선지자선교회 가르치고 가르침 받는 것의 생명은

 

1987. 6. 17. 새벽 <수>

 

본문:갈라디아서 6장 6절∼8절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이것을 여러 시간 증거했습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모든 좋은 것을 가르치는 자만 하지 말고 가르침을 받는 자만 하지 말고 가르치는 자나 가르침을 받는 자나 다 같이 좋은 것을 하라 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 믿는 사람들은 양면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백 목사도 가르치는 동시에 가르침을 받습니다. 만일 가르치는 그 위치만 가지고 있고 가르침을 받는 위치를 없다고 하면 백 목사는 절단납니다. 또 그 밑에 있는 장로님들이라든지 권사님 권찰님 집사님 뭐 반사 선생님들 다 그렇습니다.

자기는 언제든지 가르치는 동시에 가르침을 받는 것을 같이 하고 가르침을 받아 가지고 또 가르치고 이래서 양면을 가지고 있는 건데 양면을 가진 것을 깨닫지 못하고 일면만 자기가 생각하면 치우쳐서 실패하게 됩니다. 이해가 됩니까? 백 목사는 그라면 어데서 가르침을 받는가? 첫째는 하나님께 가르침을 받고, 또 주일학생들에게도 가르침을 받고, 또 안 믿는 사람들에게도 또 가르침을 받습니다.

또 정신 이상자 그런 사람에게도 또 가르침을 받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가르침을 받고 또 가르치는 그런 일을 하게 됩니다.

모든 좋은 것이라 말은 이 신구약 성경 도리를 가르치는 것을 표준을 해 가지고 신구약 도리를 가르치고 배우고 하는 그 모든 가르치는 것이나 가르침을 받는 것이나 그 모든 것이 좋은 것이라, 그러면 불신자에게도 배운다 말은 뭐 그 사람들이 뭐, 불신자에게서 진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나는 성경을 알지마는 그들은 성경 모릅니다. 성경을 몰라도 내가 성경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의 언행심사에서 성경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악한 것을 볼 때에 선한 걸 배울 수가 있고 검은 걸 볼 때에 흰 것을 배울 수가 있고 그렇게 깨달을 수가 있는 것을 범위 넓게 가리켜서 말합니다.

이 가르치는 일과 또 가르침을 받는 일에는 생명이 뭐이 생명이냐 하면은 그대로 행하는 것이 생명입니다. 행하는 것이 없으면 이거는 그 교훈이 다 죽은 교훈이 됩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도 죽은 교훈, 가르치는 자도 죽은 교훈.

가르치는 자가 행하지 안하고 가르치면 저는 죽는 일을 하게 되고 또 가르침을 받는 자도 가르침만 받고 행하지 안하면 그렇게 됩니다. 가르치는 자가 행하지 안하면 첫째로 자기가 손해를 보고 그다음으로 가르침을 받는 사람도 손해를 봅니다.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저들이, 서기관과 제사장들이 모세의 자리에 하나님이 세워 놨기 때문에 그들이 가르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대로 지켜 행해라. 그러나 그 행함은 본받지 말아라.” 한 것을 보면은 그들은 행하지 안하고 가르치기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행하지 안하고 가르칠 때에 가르침을 받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손해가 없고 다소의 손해가 있지마는 본인은 완전히 손해를 봅니다. 가르침을 받는 사람은 또 받은 대로 행하지 안하면 그는 완전한 손해를 보고 맙니다.

그래서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그렇지 안하면 “스스로 속이지 말라” 스스로 속이는 사람이 된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르침을 받고 또 가르치고 하는 사람들이 행하는 데에, 행하는 데는 그저 행하면 꼭 같이 되는가? 또 행하는 데 행하라 하고 난 다음에 그다음에 행하는 데에 주의될 것이 거게 여러 것이 있기 때문에 행하는 데도 주의할 일이 있습니다. 주의하지 안하면 실패될 그런 일이 있습니다.

행하는 데도,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내 피와 살을 먹는 자는 나로 인하여 살리라” 말씀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것 다 산다 말이 행한다 말인데 하나님의 도리를 가르치는 것이나 배우는 것은 다 예수 믿는 도리를 가르치고 배우는 것인데 가르치고 배운 대로 행할 때에 그 행하는 동기가 어데 있느냐? 그게 문제입니다.

“나로 인하여 살리라” 주님으로 인하여 행해야 되지, 주님 중심으로 하고 주님을 위주로 주님으로 인해서, 주님으로 인하라 말은 주님 때문에 행하고 주님의 그 돕는 힘으로 행해야 된다 하는 것입니다.

행하는 데는, 행하는 데에는 거게는 인간 위해서도 행할 수 있고, 또 돈 위해서도 행할 수 있고, 자기 위해서도 행할 수 있고, 세상 위해서도 행할 수 있고, 주님 위해서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행하는 데도 뭘로 인해서 행하느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만일 그 사람이 돈으로 인해서 하나님 말씀을 배워 가지고 돈으로 인해서 행합니다. 만일 그 목회자가 말씀을 가르치며 자기도 행하면서 가르쳐도 가르치는 것이 돈으로 인해서 가르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이래 행하며 이래 가르쳐야 모든 보는 사람들에게 덕이 되고 이래서 연보도 많이 나오고 또 내게 대해서 모두 다 대접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어떻게 될까? 예수 믿는 사람 가운데에 장가 예수 믿는 사람 많고, 또 예수 믿는 가운데에 자기 자본을 대 주는 그 자본 얻기 위해서 예수 믿는 사람도 많고, 또 그것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아서 출세하기 위해서도 믿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뭐 행하면, ‘서울을 갈라면 북쪽을 향해서 북쪽으로 가야 된다’ 하는 말이 틀리지 안한 말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면 북쪽으로 가면은 지금 북쪽으로 가는 데에도 뭐 이리 가고 저리 가고 북쪽이 서울만 있는 게 아니라 북쪽이라 하면은 여기서 나서 가지고 북쪽을 향한다면은 얼마든지 이렇게 뻐드러져 나갈 수 있기 때문에 북쪽만 간다고 서울이 닥치는 것은 아니라 그말이오.

그러면 이제 북쪽으로 간다, 북쪽으로 간다고 하면은 그라면 지금 네가 거기서 가는 데에는 어찌 가야 되느냐? 거게 가는 데에는 꼭 직선으로 말하면은 어떻게 어느 방위로, 북쪽 중에도 방위가 많이 널리 있기 때문에 어느 선으로 가면 된다 이렇지마는 그 선으로 가 가지고는 강이 있어서 가지 못하는 것도 있고 또 산이 있어 가지 못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것도 세주가 그리 가는 데에는 ‘그럴 때 얼마 가 가지고는 오른쪽으로 돌아서 어떻게 가야 되고 얼마 가 가지고는 왼쪽으로 돌아서 또 배를 타야 되고 어떻게 가 가지고 어떻게 되고’ 하는 그것도 세밀한 그게 있지 안하면은 그 목적지인 서울을 갈 수가 없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대체적으로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은 그 행함과 함께 하지 안하면은 다 헛일이다. 행함과 함께 하지 안하면 어찌 되느냐? 그것은 자기가 자기 속이고 자기가 자기 망치는 일이 된다. 행하지 안하면서 가르치니까 가르치는 말씀이 자기를 정죄하는 게 되고 맙니다. 이렇게 해야 된다 해 놓고 제가 안 했으니까 정죄하게 되는 것 아닙니까? 가르치는 대로 행하는 데에는 또 행하는 데도 그 행하는 동기가 문제라 그말이오.

그 행하기를 만일 사람을 위해서 사람으로 인하여 행한다면, 자기로 인하여 행한다든지 그거 또 어떤 가족으로 인하여 행한다든지 사회로 인하여 행한다든지 행한다고 하면은 사람을 인해 그 행하기는 행했습니다. 말씀대로 행하기는 행했습니다. 행했는데 그 행한 것이 하나님으로 인하여 행하지 안하고 사람으로 인하여 행했으면 그 행함을 가리켜서 뭐라고 말합니까? 무슨 주의라고 말합니까? 인본주의라고 말하는데 요걸 알아야 됩니다. 인본주의라 하니까 인본주의로 그 사람이 행했으니까 그 사람은 결과를 무슨 결과를 또 맺겠습니까? 그 결과는 무엇을 상대하는, 상대해서 노력하겠습니까? 무엇을 상대해서 노력하겠습니까? 사람으로 인하여서 출발했으니까 그 사람이 노력하는 것은 하나님을 상대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여기시나?’ 또 `하나님이 기뻐하시나 어떻게 하시나? 하나님이 찬성을 하겠나 하나님이 부정을 하시겠느냐?’ 이것을 상대로 목적으로 해서 하게 되겠습니까 그 사람이 ‘이 사람이 어떻게 여기겠느냐?’ 사람의 비위, ‘사람이 뭐라고 말하겠느냐?’ 사람의 입을 상대하고, ‘사람이 어떻게 보겠느냐?' 사람의 눈을 상대하고, ‘사람이 어떻게 듣겠느냐?’ 사람의 귀를 상대하고 이럴 터이니까, 그러면 만일 그 사람이 사람의 이목구비 모든 그 감정을 상대해서 행한다고 하면은 그 사람의 행동, 신앙 행동은 뭐이 되겠습니까? 무슨 주의가 되겠습니까? 자꾸 인본주의로 말할 게 아니라, 그 무슨 주의가 되겠습니까? 인본주의가 아니라. 뭐이 되겠소? 뭣이? 도덕주의가 됩니다. 알겠습니까? 기독교 도덕주의.

이해가 됩니까? 또 기독교는 언제든지 전면을 가지고 있는 게 기독교입니다. 그러면 기독교에는 하나님도 상대하고, 사람도 상대하고, 또 이 일과 물질 사물도 상대하고 이렇게 다 상대되는 것인데 다만 기독교 걸음을 걸어가는 데에는 보다가 거기 들었습니다, 보다.

자, 인본주의는 어떤 게 인본주의입니까? 그 사람들 인본주의는 무신론주의가 인본주의입니까? 인본주의는 뭐이 인본주의지요? 인본주의는 녜, 인본주의도 하나님을 전연히 부정한다면 그거는 무신론주의지 인본주의 아닙니다. 인본주의라 하는 것은 첫째 하나님 그다음에 사람 그렇게 보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앞세우는 게 그게 인본주의입니다. 또 신본주의는 그라면 사람은 돌보지 않습니까? 사람 돌보지 않는 게 아닙니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앞세우는 것이 신본주의입니다.

이러니까 인본주의도 옆으로 보면은, 하나 비유로 말한다면 옆에서 보면은 꼭 같습니다. ‘이 사람도 사람 말하고 저 사람도 하나님 말하고 하나님과 사람을 다 같이 말하는데’ 그러면 인본주의는 예를 들면 요래 가지고 지금 둘이 딱 붙어 있습니다. 인본주의와 신본주의가 멀리 떨어지지 않소. 꼭 같소. 이러기 때문에 사람이 속습니다.

이 인본주의와 신본주의는 어데서 봐야 압니까? 앞뒤에서 봐야 압니까 옆에서 봐야 압니까? 옆에서 보면 하나님도 있고 사람도 있고 요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옆에서 보면은 미혹을 받고 잘 모릅니다. 앞뒤서 보면 압니다.

앞뒤서 보면은 신본주의는 자기가 앞에 놓고, 앞에 놓고 이래 지금 신본주의로 본다면, 자기가 앞에 놓고 신본주의로 본다면은 무엇은 안 보이겠습니까? 인본주의가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사람이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조사님? 앞에 두고 보면, 앞에 두고 보면 인본주의와 신본주의를 앞에 두고 보면은 신본주의는 하나님만 보이고 사람은 안 보입니다. 인본주의는 사람만 보이고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해가 됩니까?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겠어요? 양성원 학생들 이해가 돼요? 옆으로 보면은 둘 다 있기 때문에 사람이 옆으로 보니까 ‘여게는 사람 말 안 하나? 거게는 하나님 말하지 안하나? 다 하나님 사람 다 상대하고 돌보고 상대해서 그렇게 하나님과 사람에게 다 맞출라고, 사람에게 하나님에게 맞출라고 이렇게 한다.’ 이러니까 사람들이 유혹받기 쉽습니다.

앞뒤로 보면은, 앞뒤로 보면은, 자기가 그 앞뒤를 가지고 살필라고 하면은 신본주의는 처음에 하나님만 보이고 사람 보지 않습니다. 또 인본주의는 사람만 보고 하나님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 보고, 하나님만 보고, 하나님만 보고 사람 보지 안하고 하나님만 봐 가지고 하나님만 보고 난 다음에 하나님 만나 가지고 그다음에 사람을 만납니다. 또 인본주의는 하나님 안 보이고 우선 사람부터 생각해 가지고 이렇게 사람에 대한 것을 자기가 모두 다 이렇게 해 가지고 난 다음에 사람 먼저 생각하고 나서 ‘이거야 하나님을 안 넣으면 안 되겠다. 하나님도 생각해야 되겠다.’ 하나님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신본주의 인본주의 이런 것을 잘, 신본주의냐 인본주의냐 하는 것은 신본주의라고 사람을 모르는 게 아니고 신본주의는 하나님을 모든 피조물보다 앞두는 것이 신본주의요. 또 인본주의라 하는 것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게 아니요. 하나님 부인 안 하지마는 첫째가 뭐이냐? 사람을 첫째 보고서 하나님을 뒤에 보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본주의 신본주의, 주의라 말은, 주의라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그 사람이 계획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데 있어서 제일 보다 제일 먼저 주로 생각하는 것을 어떤 걸 주로 생각하느냐 하는 그거요.

그러면 뭐 사람들이 기독교 유물주의를 한다고서 그 사람은 하나님 안 생각하느냐? 하나님 생각하지 않고 그만 물질만 생각하는 것이 기독교 유물주의 아닙니다. 기독교 유물주의에도 하나님 생각합니다. 생각하지마는 물질을 첫째로 삼고 그다음에 하나님을 삼는 것을 가리켜서 기독교 유물주의라 말합니다.

또 그 사람은 기독교 유물주의라 하는 것은 그 사람은 하나님도 생각하고 사람들도 생각하고 뭐 일들도 생각하고 다 생각하지마는 제일 물질을 제일 먼저 생각한다 할 때에 그 사람은 유물주의라 그랍니다.

여기 인본주의 신본주의 도덕주의 정치주의 사회주의 윤리주의 세상주의 육체주의 이거 모두 인정주의 이런 것 다 그 주의라 하는 것은, 그 주의라 한다고 하나님이나 사람이나 이렇게 뭐 물질이나 그런 것을 돌보지 않는 것은 아니고 다 돌아보고 상관하기는 하지마는 제일 첫째로 뭘 생각하느냐 하는 그것을 가리켜서 주의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에 “나보다 더 무엇을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안하다. 자기 목숨보다 나를 더 사랑하지 안하면 안 된다. 나보다 목숨을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않다.” 그 보다라는 말은 주의를 들어서 말씀한 것입니다.

이러기에 우리가 대체적으로 이렇게, 처음에 서울을 갈라 하면은 방향을 처음에 북으로 가야 된다 하는 그것부터 택해야 되고, 이 남으로 간다면 암만 해 봤자 없습니다. 북으로 가면 또 그다음에는 소지가 어찌 되느냐? 그다음에 소지를 봐야 되고 자꾸 이래서 자꾸 좁게 좁게 찾아나가지 안하면은 못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무슨 논문을 쓴다 해도 논문 쓰는 방법이 제일 처음에 어느 과에 속했나 근본적으로 이렇게 원 전체를 들어서 자기는 주제를 해 놓고 그다음에 거게서 그렇게 전체를 들어 놓고 ‘요 가운데에서 어느 부분을 나는 공부하겠다.

나는 안과를 공부하겠다. 나는 내과를 공부하겠다.’ 그러면 나는 의사가 아니니 모르지마는 내과를 공부한다면은 ‘내과 가운데는 나는 간을 공부하겠다. 나는 폐를 공부하겠다.’ 또 그리 되겠습니다. 또, 간을 나는 모르지만 간을 공부하는 데도 ‘간에 어떤 요소를 나는 전공하겠다’ 자꾸 이렇게 들어가서 파 들어가지 안하면은 일을 못 한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병원에 가 가지고, 전문의라 하면은 거게 대해 전문의를 찾아가는 것은 모두 그 면을 전공적으로 했기 때문에 지금 알 수 있다 해서 그런 분들을 신임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안과 의사, 안과 의사가 만일 안과 공부를 할라 하면은 뭘 공부해야 됩니까? 첫째 뭘 공부해야 되겠소? 이 의사 보자, 물어 봐. 의사 선생님 말해 봐. 안과 공부할라면 뭘 공부해야 돼? 동자를 공부해야 되는가 눈껍데기를 공부해야 되는가? 몸 전체를 공부해야 됩니다. 몸 전체를 공부하고 난 다음에 그다음에는, 이는 눈이라 하는 것은 머리에 속한 것이니까 전체를 공부하고 난 다음에 머리를 공부할 것이고, 머리 공부하고 난 다음에 차차차 자꾸, 안과로 말하면 자꾸 찾아들어가서 들어가야 눈이 있지 그리 안 하면 눈이 없어. 그래 가지고 ‘이 눈은 어데가 고장이 나 가지고 이리 됐다.’ 그러면 그 눈을 보고서 눈의 고장난 것이 이것은 팔에서 팔에 연결돼 있다 어데 연결돼 있다 그것을 알아야 그 사람이 하지 눈 그것만 알고 다른 데 그 전체에 연결돼 있는 그걸 모르면은 눈을 버리기 쉽다 말이오. 버리기 쉬워.

이러기 때문에 한의, 침놓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침을 놓는데 금방 침을 놓으면 그 침을 다른 데 놓지 안하고 이 발목 말이요, 이 발목 밑에 여기만 놔도 금방 놓으면 사람이 그만 정신이 이상이 돼 가지고 막 웃고 그만 미친 사람이 돼 버립니다. 금방 놓으면 그 사람이 또 아주 뭐 무슨 눈이 고장 났는데 발에다가 어데 놓으면 눈이 그만 고쳐져 버리고 만다 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전체가 다 연결돼 있기 때문에 이 연결된 관계를 모르면은 그 의사는 명의가 못 되고 실력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수많은 가운데에서, 과학은 물리입니다. 과학은 물리라.

물리라 하면은 과학 가운데에 그라면 이거는 어느 종류에 대한 과학이다 또 그 종류를 나눠야 될 것입니다. 그냥 과학이라 해 가지고 어떤 과학자가 되는 거 아니라. 과학 가운데 무슨 종류, 또 그라고 난 다음에는 무슨 뭐 이런 물질이나 저런 물질이나 하는 그런 거, 그리 안 하면 이거는 또 세균과에 대해서 세균이라는 거 자꾸 이렇게 나눠서 쪼개져 나가는 데에 가 가지고 거게서 성공이 있고 실패가 있는 것이지 그냥 줄기 가지고는 되는 것 아닙니다.

이러기 때문에 오늘도 기독교에서 둥치 이게 문제가 아니오. 둥치는 지금 벌써 칼빈 시대에 알았던 신조와 교리는 오늘날 대개는 주일학교 학생도 다 알고 있습니다. 우리 서부교회 주일학교 학생들은 아마 이 거의 학생들도 이 뭐 조직적으로 무슨 오대 교리나 뭐이나 그런 거를 말하면 모르지마는 알고는 거의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가지고는 또 안 되니까, 시대가 바꿔지니까 또 달라진다 말이오.

그것을 성경에 어데다 말했느냐 하면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인으로 난 자 가운데는 세례요한만치 큰 자가 없다” 그렇게 주님이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세례요한이 뭐 그 사람이 신앙이 크고 행위가 위대해서 구원이 크다 그말 아니오.

뭘 말했는가? 그러면 그것도 ‘여인으로 난 자 쳐놓고는 세례요한보다 더 큰 자가 없다’ 하면은 그걸 그리 큰 자 없다 하면은 어떻게 큰지 그걸 알아야지 그것 모르고 이래 하면 또 소용이 없다 그말이오. 어떻게 큰 것을 말합니까? 몸이 크다 말이요, 구원이 크다 말이요, 이력이 크다 말이요? 뭐이 크다 말입니까? 또 그것도 그것 또 쪼개야 돼. 큰 것도 꽉 찼는데 몸뚱이 크다 말인가, 명예가 크다 말인가, 사역이 크다 말인가? 뭐이 크다 말인가? 구원이 크다 말인가? 뭐이 크다 말이요? 크면 뭐이 크냐 또 쪼개야 될 거라 그말이오.

크다 하는 말은 그는 예수님을 중심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중심해서 대소를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에게 대해서 제일 역할하기를 제일 예수님에게 대해서 여인으로 난 자 중에는 세례요한의 역할이 제일 컸다. 왜? 같이 있으며 예수님은 어떤 분이라 하는 것을 세례요한이가 증거하지 안했습니까? 그러면 예수님에게 대한 역사, 예수님과의 연결, 예수님에 대한 지식, 예수님을 중심해서 하는 것은 과거 구약에 모든 선지자들이 많지마는 지식적으로도 예수님께 대한 지식은 세례요한 지식이 이제까지 이사야도 있고 뭐 예레미야도 있고 위대한 그 이사야 그런 사람도 있지마는 세례요한이가 예수님에게 대한 지식을 제일 명확하고 똑똑히 광범위로 가지고 있었다. 역사도 그랬다.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세례요한보다 크다” 이거 무슨 말이요? 이것도, 그러면 천국이라면은, ‘천국에 있는 사람들은, 아마 천국에 가서 그러니까 세례요한은 천국에 가서는 제일 아마 작은 자인가보다’ 그러면 세례요한이 천국에 제일 작은 자이면 천국에 큰 자는 어떤 자겠는가? 그게 아니라 그말이오.

신약 시대에 예수님이 사활의 대속을 완성하시고 난 후 예수님의 구속을 힘입어서, 대속을 힘입어서 중생돼 가지고 제사장 선지 왕직을 받아 가지고 지금 영감과 진리대로 사는 이 신약 시대를 가리켜서 천국에 있는 자들이라 말했어.

신약 시대에 있는 자들.

그러면 신약 시대에는 “천국에 있는 자들은 이 세례요한보다 지극히 작은 자도 크다” 그말은 뭐이냐 하면은 예수님에게 대한 지식이나, 예수님에게 대한 지식이나 또 예수님에게 대해서 관련이나 그 모든 것이 세례요한보다 크다 그말이오.

세례요한은 그때 아직까지 우리와 같은 중생을 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우리와 같은 중생을 하지 못하고 죽었어. 미래에 있는 중생을 신망하였지 아직까지 예수님이 부활하기 전에는 세례요한이도 그때 무덤에 장사해 놨는데 예수님이 십자가 못박히기 전에는 무덤 속에 들어 있었어. 못 나와. 무덤에서 벗어나오지 못해. 사망에서 벗어나오지 못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에 무덤이 열렸어.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 무덤에서 살아났어. 예수님이 부활하셔 가지고 무덤에 나왔을 때 그때 자던 성인들이 살아나 가지고 나왔다 그거요.

이러니까 예수님과 관련이 신약 시대에 있는 사람은 지극히 작은 자라도 예수님과 관련도 더 크고 지식도 더 크고 모든 게 더 크다 하는 이걸 자꾸 이렇게 맞기까지 분해해서 나가지 안하면 안 돼.

이런데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 자기가, 자기에게 양심이 있기 때문에 자기 무슨 어떤 그 사건을 대해서 양심으로 생각하다가 요만치 이래 생각해 요렇게 요렇고 생각하다가, 생각하다가 그다음에 한 토막만 더 생각하면은 무엇이 나오겠는데 나오면 자기에게 부담이 됩니다. 자기에게 부담이 돼.

그라면 꼭 요렇게 해야 된다는 그것이 발견될 터인데 그 발견하고 난 다음에 내가 행하지 안하면은 도로 큰 죄책을 느낄 터이니까 그걸 발견할 것이 아니라 그만 요만치 하고 말아야 되겠다. 자기가 더 생각하면 그래 걸어서는 안 된다 하는 것 알 수 있는데 지금 그 걸어가지 않기 위해서 거기 가다가 중단을 합니다.

그것이 뭐이냐? 그것이 성령을 훼방하는 죄에 속한 것입니다.

알 수 있는데, 알 수 있는데 제게 부담이 많으니까 ‘아이고 차라리 모르고 그만 이와 같이 행하는 게 낫지 더 알고 행하지 안하면은 그 가책이 더 되고 정죄를 더 받지 않을 것이냐?’ 네가 속았다. 네가 성령을 훼방하는 자다. 영감이 네게 환하게 보이는데, 왜 더 생각하고 생각하면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는데 생각하지 안하고 중단하고 마느냐 그말이오.

옳은 줄 알고 부정하는 그것이 성령 훼방죄입니다. 그거는 사함 못 받아요.

그거는 고쳐야 되지 그거는 사함 받는 게 아니라. 그냥 사함 가지고 지나가는 게 아니고, 사함이라 하는 것은 지나간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이지 앞으로 지금 전진해 나가는 데에는 고해 가지고 되는 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받아 가지고 행해 나가야 돼요.

그런고로 여러분들이 자꾸 이렇게, 신앙 양심은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인데 자기 양심으로 무엇을 생각할 때에 요만치 생각하고 더 생각할 수 있는데 생각하지 않는 그것은 뭐입니까? 마태복음 5장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18절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그러면 천국에 여게도 크고 작은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하나라도 버린 것은 자기가 못 행하는 것과 버리는 것과, 자기가 모르는 것과 버리는 것과 다릅니다. 모르는 것, 알 수 있는데 안 아는 그거는 버리는 것이오. 행할 수 있는데 안 행하는 것은 버리는 것이라 그말이오.

그러면 우리는 문서계시로 다입니까? 문서계시를 벌써 공부하는 자 아는 자는 문서계시 속에 영감계시가 있다 하는 것을 하나님이 알려 주셨다 말이오.

이러니까 영감계시까지 우리는 책임이 있습니다. 문서계시만 책임이 있는 게 아니고. 그러기 때문에 책임을 회피 못 합니다.

빌라도가 자기가 손을 씻고 이렇게 했지마는 기어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받아 가지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하는 그거는 자기가 자기의 책임을 벗어나지를 못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진리를 찾는 데에, 찾는 데에 그것을 자기가 포기하지 마십시오. 또 자기가 행하는 데 못 행하면 하나님께 구해 가지고 아는 대로, 아는 대로 자꾸 알라 하고, 아는 대로 더 알라 하고, 또 행하는 대로 더 바로 행할라고 애를 써야 되지 나는 요만큼이라고 제가 단정을 지워서는 안 돼. 그러기 때문에 빌립보 3장에 “어데까지 갔든지 그대로 지금 달려야 된다” 했어. 그렇지 안 했어요? 그런고로 여러분들이 잘못하면 속기 쉽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에게 속하느냐 사람에게 속하느냐 둘 중에 하나지, 그러면 사람에게 속한 사람은 사람을 뭐 사람만 알고 하나님 모른다 말이요? 하나님 아요. 하나님께 속한 자는 또 하나님만 알고 사람 모른다 말이요? 아요.

이렇지마는 하나님에게 속한 자인지 사람에게 속한 자인지 뭘 보고 압니까? 하나님께 속한 자와 사람에게 속한 자를 뭘 보고 알겠습니까? 한번 대답해 봐요.

○○○조사님 한번 대답해 봐. 녜, 하나님에게 속한 자냐 사람에게 속한 자냐 하는 것은 그 결과를 보면 압니다. 결과를 보면 알아요. 어데서 무엇에게 피동되느냐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어. 무엇에게 피동되느냐 하는 것을 보면은 알 수가 있어.

또 그다음에는 뭘로 압니까? 무엇을 위하는, 무엇을 위하는 결과를 맺게 되느냐? 알 수 있어.

이러기 때문에 자꾸 의사가 환자를 고치는 데에는 하나 가지고 진찰하는 게 아니라 진찰기가 여럿 있어 가지고 이거 과학적으로도 진찰도 하고 경험적으로도 진찰도 하고 또 통계적으로도 진찰하고 모든 면으로 이렇게 진찰해야 되지 저 사람은 진찰하는 그 방편이 열인데 이 사람은 하나밖에 없으면은 하나 있는 그 사람은 저 열 가진 사람의 십분지 일밖에는 모를 수 있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우리들이 하나님에게 향하여 나아갈 때에는 다하라는 말이 그말이 남구지 말라 말입니다, 다하라 말이. 그러니까 깨닫는 건,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도 ‘나는 이만치만 하면 됐다’ 하면 하나님 앞에 벌써 버림을 당합니다, 그때부터. ‘나는 여게까지 해서 더 위에 것 하지 못했는데 지금 어쨌든지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죽는 날까지 자꾸 앞으로 걸어야 되겠다’ 이렇지, 내나 후퇴하는 것이 뭐이냐 하면, 뒤로 물러가는 것이 뭐이냐 하면 중단하는 것이 뒤로 물러가는 것이라. 그러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이래서 여러분들이 어데까지든지 그렇게 자꾸 노력해서 전진하고 향상하는 것을 자기가 중단하거나 그라면 안 됩니다.

오늘 아홉시 반까지 오면은 상가에 가서 출상 예배에 참석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모자라도 부족해도 자기는 죽는 날까지 자꾸 힘쓰는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셔도 자기는 아무리 능한 사람이라도 ‘나는 이만하면 됐다’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은 같이 하지 않습니다.

이만하면 됐다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어떤 사람이요? 시편 1편에 그 사람을 어떤 사람이라 했소? 오만한 자입니다. 오만한 자는 하나님께 상관이 없어.

우리가 얼마나 했기 때문에 이만하다 해? 항상 부족해서 그저 죽는 날까지 자꾸 힘쓰고 힘쓰고 가고 가야 되지, 오늘은 교회들이 뭐이냐 하면은 전부 오만한 자리에 앉고 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나는 요만치 믿고 말란다, 요만치 믿고 말란다.’ 제대로 제가 다 한정 정해 가지고 ‘나는 이 이상 않겠다.’ 그러니까 자기의 신앙을 자기가 한정지웠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줄 수도 없고 또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과 상관을 할 수가 없는 사람이 됐다 말이오. 그런 미혹에 빠지면 안 됩니다.

주일학교 반사 선생님들은 지난 공과를 한번 더 하니까 어짜든지 명상해 가지고 거게서 자신이 은혜를 받도록 하십시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끝까지 끝까지, 요걸 기억하십시오. 끝까지, 끝까지. 끝까지 우리는 가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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