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21 13:36
1988. 1. 2. 토새벽
본문:히브리 12장 1절∼5절 상반절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 대항치 아니하고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세상에 모든 일이 다 배움에서는, 배우는 데서는 크게 나누어서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배워 가지고 실지로 성공을 하든지 말든지 그 성공에는 생각이 없고 다만 배웠다는 그런 간판을 가질려고 하는 사람, 실지로 성공할려는 사람이 있고 그것을 배워 그저 간판으로, 자기 또 상식으로 모든 다른 사람에게 자기는 그런 지식을 가졌다는 그런 거 다 간판입니다. 또 다른 사람이 말하는데 자기는 모르면은 무식하니까 그저 상식으로 간판으로 이렇게 소망을 가지고 무엇을 배우는 사람이 있고 간판이나 이런 모든 상식이나 그런 것보다도 자기가 실제로 그 일을 할라고 실제의 그 실상의 실력을 가질라고 하는 사람과 두 종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의학을 공부할 때에 그저 의학에 대한 상식, 또 저 사람은 의학에 대해서 어떤 그런 일류 학교를 나왔고 또 그런 아주 우수한 그런 간판을 가졌다 이래서 간판을 딸라고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는 그런 간판을 딸라고 또 그런 논리적이나 그런 지식을 갖출라고 그렇게 생각을 하고 하는 사람이 있고, 또 실지로 내가 사람의 병을 고치는 사람이니, 의사는 고치는 사람이니 실지로 자기가 사람의 병을 고칠라고 공부하는 사람과 그 두 종류가 있습니다.
그래서, 실지로 사람 병을 고칠라고 애를 쓰는 사람 그 실상을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가 공부할 때에 그때에 까다롭고 쉬운 그런 것이 없고 까다롭고 쉬운 그거 상관없이 까다롭든지 쉽든지 어짜든지 사람 병을 고치는 그것을 바로 알아야 되겠다 이렇게 해서 그 배우는 공부하는 데에 까다롭거나 쉽거나 하는 그런 것이 문제가 안 되고 ‘실지로 사람 병을 고치는 데에는 어떻게 되느냐?’ 고치기를 목적하는 그 사람은 까다롭고 쉬운 것 그런 것 복잡하고 단순한 것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라 실지로 그 사람 병을 고칠라면 어떻게 고치느냐 하는 그런 것을 목표하기 때문에 까다로와도 고치는 그 방편을 깨달을 때에, 자기는 배울 때에 기쁘고 즐겁고 참 힘이 나고, 이것을 생각지 않는 사람은, 그저 상식으로 가지는 사람은 까다로운 거 그런 것 세밀한 거 그런 걸 배우기도 싫고 들으면 싫고, 또 간판만 따는 사람은 그런 게 필요없고 어짜든지 간판이나 그런 거나 좋은 간판 훌륭한 그런 간판을 딸라고 애를 쓰는 사람도 고 배우는 데에 그 실상을 알라고 애를 쓰는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다 배우는 사람인데, 예수 믿는 사람은 다 배우는 사람인데 어떤 것을 배우느냐? 이것은 참 영생하는 것을 지금 배우는 사람이요, 또 하나님의 자녀의 실력을 배우는 사람이요, 하늘나라에 가서 살 사람을, 안 죽고 영생하는 그 사람을 지금 그 사람의 실력을 갖추는 그것이 우리의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중요한 일을 우리가 목표로 하고 있는지, 세상에서 비교 못 할만치 그 높은 소망을 우리가 가지고 목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과학이라는 그런 것도, 이런 과학이나 저런 과학이나과학이라 말은 물질의 이치, 물질의 이치도 그 이치에 맞으면 그 물질이 조성되고 물질의 이치에 안 맞으면은 그게 조성 안 됩니다. 또 아무리 애를 써도 물질의 이치에 하나만 맞지 안해도 애써 놓은 것이 다 그만 헛일되고 맙니다.
이러기 때문에, 물질의 이치도 배워 나가면 나갈수록 자기가 어떻게 하면 되는 그 실상을 이루는 그것도 중요하고, 또 만일 잘못되면 이거 어떤 낭파가 되느냐 하는 거 안 되는 거 그것을 아는 것도 중요하고 둘 다 중요하다 그말이오.
그러나, 그것을 실지로 만들라고 애를 쓰는 그 목표가 아니고 또 이라다가 이 깨지고 절단나면 어찌 되느냐, 잘못 해 절단나면 어찌 되느냐 하는 그면에 대해서 아무 관심이 없고 간판이나 따고 명예나 따고 그저 다른 사람에게 그저 술술 말할 때에 말하는 그런 상식이나 그런 거 가질라고 애를 쓰는 사람은 그 사람은 이 과학 공부를 할 때에 그저 어짜든지 실상에 가까운 모든 가르침이 될수록 자기는 듣기 싫고 괴롭고 피곤합니다.
왜? 그것은 어렵고 힘이 들어서 가져야 되기 때문에 다 안일주의로 힘들기는 싫어하니까 무슨 편하기만 좋아하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고 실상을 실상으로 망하느냐 흥하느냐, 의사라면 사람을 죽이느냐 살리느냐, 또 자기가 이 세상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이 사업을 해서 성공을 하느냐 실패를 하느냐? 무엇이든지 다 그러합니다.
예를 들어서, 뭐 하나 조그만한 밥을 해도 밥을 실상으로 잘 지을라고 옳게 지을라고 하는 사람은 밥을 짓는 데에 대한 그 지식이 세밀해서 어떻게 하면 밥을 실패한다 어떻게 하면 밥을 잘할 수 있다, 그 실상을 원하는 사람은 거게 대한 말을 들으면 재미가 있고 고걸 알지마는서도 밥을 실상 만든다는 그런 것은 자기가 상관없는 사람은 밥에 대한 그 실상의 이치를 말하면 듣기 싫습니다. ‘뭐 그래 밥은 밥이지’ 이래 가지고서 그것을 그 실상의 올바른 지식을 갖추기를 사람들이 애를 안 쓴다 그거요.
자기가 어데를 찾아 가는데도 갈라고 할 때에 자기는 ‘아무래도 거게 가야 되지 만약 그리 가지 안하고 달리 가면 안 된다’ 저 월남할 때에 여게서 고 길을 바로 알고 요리요리 바로 걸어야 되지 요리 가면 빠져나가서 사는 길이고 고래 조금 잘못 들면은 보초 서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붙들려 가지고서 사형을 당하게 된다. 이러니까, 잘못 되면 죽고 바로 되면 산다 하는 고것을 자기가 살라고 애를 쓰는 사람, 참으로 남한으로 넘어와서 살라고 애를 쓰는 사람은 거게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세밀히 그것을 배울라고 알라고 애를 쓰고 그거 알면 반갑고 기쁘고 참 내가 죽을 그런 것을 면하게 된다 이렇게 기쁘지마는 그런 욕망이 없는 사람은 그런 소리를 듣기도 싫고 그 듣는 것이 자기에게 관심이 있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모든 범사가 다 그렇습니다.
예수 믿는 것도 자기가 참으로 성경에 기록된 이 구원을 실상으로 자기가 이룰라고 하는 사람, 고대로 실상을 이루어서 구원받을라고 하는 사람은 고 실상 구원을 이루는 데에 올바른 이치를 들으면 눈이 바짝바짝 뜨이고 그 실상을 만들어 볼라고 애쓰지 않는 그런 껍데기의 거짓된 사람은 그런 소리를 들으면 잔소리로 들려지고 듣기 싫고 괴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실상을 이루는 것은 우리의 행동으로 실상을 이루는 것이지 행동이 아니면 실상을 이루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행동을 주셔 가지고서 그 행동을 통해서 실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자기가 실상을 이룰라고 행동을 해 보면 그 가르치는 것이나 다른 사람이 말할 때에 ‘저 사람은 지금 자기가 걸어보니까 그렇더라’ 서로 걸어봐서 경험한 거와 동등되는 것도 알게 되고 ‘저 사람은 나와 같이 어데까지는 걸어왔는데 그다음에는 나는 걸어보지 못한 것을 저 사람이 말하고 있다. 그러면 저 사람 말하는 것은 나는 경험해 보지 못하고 체험해 보지 못한 그런 면이다. ’ 이렇게, 자기가 알고 또 자기가 지금 실상으로 행할라 하다가 고럴 때는 이래야 되나 저래야 되나 그걸 몰라서 당황했다. 고게서는 요렇게 나아가야 되나 어떻게 전진을 해야 되느냐 하는 거게 대해서 자기는 방황하고 몰랐다 고럴 때에 고 사람이 ‘요럴 때에 요렇게 가야 된다’ 하는, 자기가 바로 알라고 갈급을 하고 또 방황하던 그것을 길을 가리켜 주면은 얼마나 참 기쁘고 즐겁고 하지마는서도 그것이 없는 사람은 그렇치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은 다 배우는 사람이요 실상을 이루어야 할 사람인데 실상을 이루고자 하는 그것이 없는 사람은, 없는 사람이 설교를 듣는 것과 성경을 읽는 것과 실상을 이룰려고 하는 사람이 성경을 읽는 것과 듣는 사람이 정반대입니다.
가르치는 사람도 그렇습니다. 가르치는 사람도 실상을 이룰라고 애를 쓰는 사람이 가르치는 것과, 실상에는 상관없는 사람이 가르치는 것과, 또 실상을 이룬 사람들이 경험과 체험의 그 지식을 가지고 가르치는 것과 그것 없이 그냥 말로만 가지고 이렇게 말하고 실상은 해 보지 않은 사람이 가르치는 거와 다릅니다.
이래서, 다 그런 사람들이 성공합니다. 내가 그런 말을 들었는데 서울에 이 병구 목사님이라는 그 목사님이 서울에서는 그 신앙 생활을 바로 할라고 애를 쓰는 그런 계통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말하기를, 설교를 들을 때에 ‘저 사람은 자기가 실상으로 걸어가면서 걸어가는 그 노정을 말하고 있다. 저 사람은 그 길에 대해서는 상관도 없고 걸어보지도 안했고 구경도 안 한 그것을 지금 남의 말을 하고 있다. ’ 그것을 구별하는 그 말을 내가 들었습니다.
그 사람이 ‘그분은 실지로 경험하고 체험한 것을 말하고 있고 또 저 사람은, 그 사람은 아무 그거는 실상에는 해당되지 안하는 이 모든 그저 말만 하고 있는 이 거짓부리들이 하는 그런 말로 가르치고 있다. ’ 그래 내가 있다가서 고게 좀 희망이 있어서 묻기를 ‘그러면 뭘 보고 그걸 아느냐?’ 이라니까 `우리가 그래도 신앙 생활하다가 체험하고 경험하는 데에서 고 사람은 어데까지 ,왔다 어데까지 갔다, 지금 저 사람은 나보다 조금 더 앞서 갔다, 저 아직 못 따라오고 있다, 저 사람은 공연히 지금 허탄한 길을 가고 있다, 허탄한 그 말을 말쟁이로 말을 하고 있다 하는 그런 것을 짐작을 할 수 있지 않느냐?’ 그렇게 말합디다. 그런 사람은 다 희망 있는 사람입니다.
이래서, ‘허다한 간증자들이 구름같이 둘러 있다’ 이래서 우리가 성경에서 구원 도리를 배우는 동시에 다 믿는 신자들은 신앙 걸음을 가고 있고 구원을 이룰 수 있는 자기와 꼭 같은 입장에 사는 사람이니까 세상에 공부가 많지마는서도 자기와 꼭 같은 그 학교에서 꼭 같은 과를 공부하고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이러니까, 다른 사람이 공부해서 자꾸 얻어 가지고 가는 그것이 곧 자기가 얻어 가지고 가는 것이고 옳은 사람은 그 사람과 같이 자기가 돼야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이요, 또 삐뚤어져서 실패할 사람과 같이 가면은 자기는 실패할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에게서 자기는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성경에만 간증자들 있는 게 아니고 뭐 수많은 사람들이 다 천태 만상의 생애를 하고 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사람에게서 장점도 배우고 단점도 배우고, 또 오 리 가다가 방종한 사람도 배우고, 백 리 가다가 방종한 사람도 배우고, 끝까지 걸어가는 사람도 있고 수많은 종류의 사람이 많이 있기 때문에 사람에게서 네가 배우라. 사람에게서 그 사람이 어떻게 걸어와 있는가 하는 그런 것을 배워라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기독자들 가운데서도 자기가 실상을 이룰라고 하는 사람은 그 말을 웅변도 상관없고 열변도 상관없고 벙어리도 상관없고 끙끙거리든지 어짜든지 자기가 실상을 이루는 데에 그 사실을 말하는 그것이 가치 있기 때문에 그것을 찾아 돌아다니고, 그것을 들을라고 돌아다니고, 그것을 배울라고 돌아다니고, 그렇지 않는 사람은 웅변이 필요하고 열변이 필요하고 고함이 필요하고 이러나 암만 해도 자기가 구원의 실상을 이루는 데는 아무 상관없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실상을 이루는 데는 상관없는 말을 하고 있으면은 그 사람은 아무리 일주간 내 사경회 하는데 언변이 그렇게 쏟아져 나와도 자기의 얻을 것은 하나도 없고 공연한 허탄한 소리다. 또 아무리 끙끙거리니 애가 타서 에이구 말도 할 줄 모르고 이거 한 마디도 옳게 안 된다 이래도 자기가 실상을 이룰라고 하는 사람은 그 실상을 이루는 데에 유익이 되기 때문에 그걸 자꾸 들을라고 하는 그런 것입니다.
이 설교록을 자꾸 가져가는 사람들이 자꾸 가져가서, 모두 우리 진영의 목사들은 별로이 가져가지 안한답니다. 가져가지 안하고 이런데 다른 데 교역자들이 더 많이 가져가는데 설교록이 거의 다 절판이 되고 없대요.
그래 내가 저 아레께는 설교록을 내가 읽어 봤어. 이거 설교록이 참으로 이거 뭐 볼 만한 무슨 가치가 있어서 가져가나 어째 가져가나? 내가 설교록을 읽어 봤어.
읽어 보는데 내가 한 페이지를 억지로, 다른 책을 나는 잘 안 읽는 사람인데, 성경 외에는. 한 페이지를 읽어 보는데 암만 읽어 봐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무슨 말인지. 말도 이거 ‘그’ 할 것을 `고' 했으니까 `그것이 고것이' `그것이 고것이' 이래 놓으니까 무슨 말인지 나는 봐야 도무지 모르겠어요.
이런데, 이거 이상하게 이걸 뭐할라고 이걸 사람들이 사 가지고 갈까? 아마 그 사람들이 사 가지고 가는 것은 대개 사 가지고 가는 사람들은 보면 다 그래도 좀 유식한 사람이고 좀 열심 있는 사람들이 사 가지고 가고 목회를 잘하는 사람들이 사 가지고 가는데 ‘그 뭘 보고 사 가지고 갔는가?’ 그좀 이상하다 하는 것을 제가 느꼈습니다.
그 사람들이 얄궂은 말이 자꾸 이래 기록해 있어도 자기가 실상으로 걸어갈라고 할 때에 요리 가야 되는, 요리 동쪽으로 가야 되나 서쪽으로 가는가? 고거 가다가 어데로 가야 될지 몰라서 지금 방황하고 있는 고런 사람들이 고거 고럴 때에 요리 걸어가야 된다 하는 고 말이 한 마디 나오니까 고것이 가치가 있어서 자꾸 지금 많은 말을 외워요.
그래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백 목사님 설교록은 참 좋기는 좋은데 좀 아쉬운 점이 있더라’ ‘뭣이 아쉬운 점이 있느냐?' `고거 그만 하나만 탁 들어서 말하면 되는데 고 바로 옳은 거, 옳게는 다 해석을 해 놨고 옳기는 옳은데 옳은 거 고거 한 개를 찾을라고 하면은 그거 얼마나 읽어야 되지 그 속에 이래 들어 있으니까, 고걸 고거만 딱딱 말했으면 그만 날름날름 집어 먹었으면 좋겠는데 그게 없고 많은 말을 해 가지고서 이래이래 놓으니까 어데 들었는지 그걸 못 찾아서 참 곤란스럽다 하는 그런 말을 한다 말을 들었습니다. 실은 그런 지저분한 그런 것이 없으면 그걸 똑똑히 모르게 됩니다.
이래서, 지금 이 설교에 대해서도 ‘허다한 간증자들이 구름같이 우리를 다 둘러싸 있다’ 이 말은 그 간증은 들어야 되지 간증은 듣지 안하면 무슨 소용 있습니까? 간증을 들어야 되지. 간증을 듣는 것은 뭐할라고 듣느냐? 그 사람 간증 듣는 것은 증거를 들었으니까 그 증거 들어 가지고 ‘나도 그와 같은 걸 한번 봐야 되겠다.
그와같이 해 봐야 되겠다. 그와 같은 실상을 만들어 봐야 되겠다. ’ 별별 사람이 있으니까 ‘이 사람은’ 실패한 사람도 수많은 층어리의 실패의 종류가 있고 ‘이 사람은 요러다 실패, 조러다 실패, 조러다 실패. ’ 모든 실패한 사람도 수많은 종류의 실패가 있기 때문에 내가 실패를 방지할라면 수많은 종류의 실패 그것을 배워 가지고서 그걸 방지해야 방지가 되겠고, 또, 성공도 일 프로 성공한 사람, 십 프로 성공한 사람, 오십 프로 성공한 사람, 백 프로 성공한 사람, 성공한 사람 수많은 자가 있기 때문에 고걸 배워 가지고서 요게서 ‘요 사람은 요까지는 성공하다가 요게서 실패했다’ 성공을 할라면은 성공한 사람을 다 그것을 듣고 보고 하면 내게 그 참고가 된다 말이오. 참고가 도움이 되기 때문에 그래 간증을 듣는 거 아닙니까? 간증하는 사람도 나도 이래이래 해 가지고서 실패했다 하는 것을 간증하는 것이요 나는 이리이리 해 가지고 성공했다 하는 것을 간증하는 것이기 때문에 간증은 자기가 듣고 자기 생활에 실질적으로 참조를 삼아야 되고 그것을 보아서 자기가 깨닫고 방비할 것을 방비하고 예비할 걸 예비하고 또 참고 견딜 걸 견디고 열심히 할 것을 열심히 하고 자기의 실 생활에 그것을 적응시켜 가지고서 도움이 있어야 되지 그 도움이 없으면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오.
그러기 때문에,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증인들이 있으니 하는 것은 이것을 증인들의 간증을 들으라 그말이오. 간증을 들어서 네 생활에, 간증을 들어서 천 명이 실패한 것을 네가 들어서 네게서 천 명의 실패를 네게서 뽑아 버려라. 또 천 명을 성공을 네가 들어 가지고서 천 명을 성공을 네 생활에서 네가 적용을 시키고 이용을 해 가지고서 그 성공을 구비하게 갖추라 하는 이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런데, 고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간증자들이 있으니’ 하는 이걸 줄줄 읽기만 읽고 사람에게서 사람을 배울라고 하지 안하기 때문에, 사람은 사람에게서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게서 배우는 것이 제일 중요하고, 둘째로는 사람에게서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 자기와 가깝고 또 자기와 같은 그런 점이 많고 또 자기와 같은 동질이요 동성이요 또 같은 소망을 가지고 목표를 가지고 같은 종류이기 때문에 거게 배울 것이 많다 그거요.
그러기에, 이렇게 자꾸 사람의 간증을 들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됩니까? 인간이 유식이 됩니다. 인간 유식이 돼. 인간 유식이 되면은 벌써 말은 안 해도 이런 거 다 있지마는서도 자기 딴에만 해도 ‘저 사람은 지금 어느 만당을 걸어가고 있다.
저 사람은 거게 지금 아주 좁은 호통에 지금 좁은 아주 그런 곳에 당하고 있다. ’ 알 수 있다 말이오. ‘저 사람 어데 와 있다. 어데 와 있다. ' 이것을 당한 사람 그 사람은 사람을 지도해서 살릴 수가 있습니다.
이러니까, 자기가 다 겪어 왔기 때문에 ‘저 사람이 지금 어떤 모퉁이에 들어앉았다. 구렁텅이에 지금 빠지고 있다. 저 사람이 덤불에 걸렸다. 저 사람이 지금 거기는 참 아주 미혹이 많은 곳에 도달해 있다. ’ 그걸 다 자기가 많은 경험을 해서 걸어왔기 때문에 그 사람을 보고서, 네가 요렇고 요렇고 요러니까 앞으로 요렇지 않더냐 말할 때에 ‘과연 내가 걷고 보니까 그런 길을 걸어왔다.
인제 그래 가지고 와 가지고 네가 이런 꼴을 당하지 안했느냐? ‘당했다’ 이러니까 네가 여게서는 지금 요리 틀어서 가야 되지 요리 틀어 가면 안 된다.
그러니까, 실제로 걸어 본 사람은 실패한 사람이라도 자기 걸어온 것을 그 사람이 말하는 것 보니까 딱 들어맞다 말이오. 딱 들어맞으니까, 또 거게서 지금 방황하는 것도 알고 있다 말이오. ‘너는 요 방황하기 때문에 네가 요리 할 마음은 많고 요리 할 마음은 적지? 그런데 요리 하면 육체의 소욕으로 살아서 망하는 것이고 요리하면 성공하는 길이다. ’ 그러니까, 실상을 걷는 사람은 실상을 걷는 사람의 말을 잘 듣고 거짓부리 하는 사람은 거짓부리의 말을 잘 듣고, 간판을 목표로 하는 사람은 간판을 잘 듣고, 간판은 이 세상의 지식도 간판입니다. 그 사람이 일류 대학을 나왔다. 또 그 사람은 국민학교밖에 안 나왔다. 또 그 사람은 유학을 했다. 그 사람은 무슨 학위를 가진 사람이다. 그 사람은 전문을 가진 사람, 전공을 하는 사람이다. 이게 다 간판인데 그 간판 위주로 하는 사람과 또 실상 위주로 사는 사람과 자기는 실상은 상관없이 하나의 상식으로 가질라고 하는 사람과 그 종류를 보고서 구별하지 안하면 헛일입니다. 그것을 구별하지 안하면 자기는 구원에 대해서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제 또 시간 많이 가서 종류만 말하는데, 모든 성공하는 사람에서 성공을 배우고 실패한 사람에서 실패를 배우고 또 일시 성공하고 다시 회복할 수 없는 그런 실패의 길을 걷는 사람이 있고 뭐 천태 만상이 있기 때문에 그 자기라는 그 자기를 사람이라는 이 사진에서, 사람이라는 이 실물에서 자기를 얼마든지 연구할 수 있고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왜? 수많은 간증자들은 별별 종류의 방편으로 성공한 사람도 있고 별별 종류의 방편으로 실패한 사람도 있기 때문에 그 실패한 사람은 대개 종류가 다 같고 성공한 사람은 대개 종류가 다 같습니다.
그래서 금년에는, 다른 사람에게서 자기를 깨달아라. 그러면 자기를 자기가 깨달을라 하면은 못 깨달아요. 자기 낯에 있는 검정은 자기가 못 봐요. 남의 낯에 있는 검정은 봐도.
다윗이 말이요, 다윗이 나단 선지가 가 가지고서 이렇고 이렇고 이런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니까 다윗이 있다가 ‘그놈을 당장 죽여야 된다. 그런 놈을 사형을 시켜야 되지 그거 냅둬 가지고 되느냐? 그놈은 사형을 시켜야 된다. ’ 이라는데, 그래 나단 선지가 있다가서 ‘바로 그 사람이 다윗 왕입니다’ 이라니까 깜짝 놀라면서 ‘아, 그래. ’ 참 살펴보니까 자기가 죽이라 하는 그 사람과 자기와 같다 그말이오.
그래, 다른 사람에게 있는 단점은 바로 보이고 잘 보이고 오히려 더 똑똑히 실상보다도 크게 보이는 것이 인간이오. 또 장점은 자기에게 있는 장점은 너무 몇 배나 크게 확대해서 보여지지마는서도 다른 사람에게 있는 장점은 보이지 않는 것이 인생이라 그거요.
이게 왜 그러냐? 그것이 원죄 때문에 그래요. 자기 중심 자기 위주 때문에 그래.
원죄와 본죄 때문에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를 연구할라 해 가지고는 안 된다.
이러니까, 이제 사람을 봐서 다른 사람에게서 자기를 연구해야 된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보고 ‘나와 다른 사람과, 저 사람과 나와 어떠냐?’ 다른 사람과 나와를 비교해서 나를 다른 사람에게서 찾아 가지고서 그 사람을 연구해 봐라. 그러면 네가 알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간증이 필요하고 중요하다 하는 그말입니다.
누가 간증을 말로 해?간증을 안 해도 모든 사람의 살고 있는 것이 벌써 이 사람은 이리이리 살았는데 이런 결과를 만났고 이리이리 살면 이런 애로가 있고 이런 애로를 극복하고 인내하고 통과하니까 이런이런 결실이 맺어졌다. 그 모두가 다 우리에게 지금 하나의 간증을 하고 있기 때문에 거게서 자기를 배우고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옛날부터 ‘남을 보아 깨달아라’ 자기는 남에게서 깨달아라 그말이오.
이거는 이 일반 사람들이 다 통계로 쓰고 있는 것입니다. 남에게서 깨달아라, 남에게서 자기를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그 모든 사람을 그 사람을 다 아는 대로 자기가 알고 난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자기와 그 사람과 비교를 해 봅니다.
이래서, 사람들이 남에게서 자기의 장단점을, 다른 사람의 장단점에서 자기가 앞으로 가질 장단점을 보는 것이 좋다 고것을 여기 말하는 것이 그렇고, 고다음에는 네가 이렇게 좋은 길도 사람에게서 배울 수 있고 나쁜 길도 배울 수 있고 그러기 때문에 그런 것이 다, 하고 있는 데 필요합니다.
성경 인물, 성경에 성공한 인물, 그 성공한 인물을 연구하면서 ‘엘리야를 연구한다. 엘리야는 어떻게 살았느냐? 다니엘은 어떻게 살았느냐, 어떻게 살았느냐? 그걸 연구해 가지고서 자기의 걸어갈 길을 걸어가는데에 다소 도움이 되는 그런 것도 있고 또 실패한 사람들도 또 있는 그런 사람을 보아 가지고서 자기의 실패를 거기서 발견해서 방비하고 치료하는 그런 일도 있고, 성경에 기록된 인물은 많지 못하지마는서도 이 세상에는 그런 인물이 꽉 찼기 때문에 우리가 실패의 길도 얼마든지 다 알아서 하나도 물샐틈없이 그 실패의 길을 다 막을 수도 있고 또 성공하는 그런 길도 다 배워 가지고서 뽀스래기 하나도 남기지 안하고 다 유익된 것은 다 취해 가지고서 성공할 수 있는 그런 것이 다 있다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사람에게 자기를 배워라 하는 그것을 여게 말합니다.
그러고 인제 해석은 할 수 없는 건데 여게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인생의, 인생 생애, 인간 생애, 사람들이 사는, 인간들의 이력에, 이력서 쓴다고 하지 안해요? 이력에 성공을 하지 못하도록 참 모로 뛰고 위로 뛰고 이리 뛰고 저리 뛰어야 이래 돼지지 한 군데만 말뚝 모양으로 박혀 가지고 있어 가지고는 사람이 안 된다 그말이오.
그러면, 사람이 이리저리 활동성,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은 그 조그만한 데 고 안에서는 지혜가 있어도 지혜도 보면은 그 사람의 지혜가 그 범위가 한 동리 범위, 한 사회 범위, 한 국제 범위, 한 세계 범위, 또 피조물과 창조주 범위 그 범위가 모두 다 있습니다.
있는데, 그렇게 사람이 오늘은 십 리 밖의 걸 연결해야 되겠다, 백 리 밖의 걸 연결해야 되겠다. 이는 다른, 세계에 있는 걸 연결해야 되겠다. 자기가 그래 연결을 가지고서라야 될 수 있는 것인데 그만 샘 안에 개구리 모양으로 그런 것을 모를 수 있다 그말이오.
그러면, 사람은 이리저리 넓히 광범위하게 활동하는 활동성, 활동성은 이것도 접하고 저것도 접하고 많은 것을 접하는 것이 그거 활동성 아닙니까, 많은 걸 접하는 것이? 그걸 모르면 안 된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인간에게는 활동성이라는 것이 있고 또 인간에게는 용감성이라 하는, 용기. 용감성이라 하는 거 있고 크게 말하면 이 두 가지 실력이 있는데 이 활동성을 뽈끈 밧줄로 당글어 매 놓으면 그만 그 활동 못 합니다. 뽈끈 붙들어 매 놓으면 죽어요.
고문하는 데에 제일 고문이 어려운 고문이 무슨 고문이냐? 제일 어려운 고문 당한 사람, 뭐 때리고 어짜고 하는 것도 거석한데 꼭 사람을 요렇게 궤를 짜 가지고서 고 안에 꼿꼿하게, ‘차려’ 하면은 꼿꼿하게 서면 딱 되도록 그래 가지고서 꼿꼿하게 서면 딱 되고 조금만 삐뚤어지면, 전부 못으로 돼 가지고 있는데. 조금만 삐뚤어지면, 반듯이 서면 못에도 한 군데도 닿고 차렷해 딱 서 가지고 있으면은 위에도 밑에도 전부 못인데 그 못에 찔리지 안하고 괜찮은데 조금만 삐뚤어지면 고 찔린다 말이오.
이러니까, 고게다 넣어 놓고 딱 고거 형틀을 딱 조아 버리니까 고 사람은 그저 꼿꼿하게만 서 가지고 있으면, 정신을 딱 차리고 꼿꼿하게만 서 가지고 있으면 한 군데도 찔리지 않는 게 괜찮애. 괜찮은데 요라면 못에 콕 찔려. 그래 가지고서, 고래 가지고 그러니까 나중에 가 그러면 거석하면 온 몸이 찔리니까 처음에 그 형을 맞는 그게 제일 힘들더라고, 그러니까 요리도 못 하고 조리도 못 하고, 조금 그만 거석해 놓으면 나중에 가서는 그 사람 할 수 없어서 그만 거게 앉아 가지고 전신에 피를 흘려 가지고 그만 죽어 버리고 마는데 그 형이 제일 어렵고, 또 그보다 더하는 거는 고만 자지 못하도록 하는 항상 깨어 있도록 이와같이 하는 그것이 아주 힘들더라고서 이래.
사람은 이리저리 이리 좀 활동을 해야 그 모든 게 살고 또 이렇게 운동을 해야 성공을 하는 것인데, 인간에게 제일 중요한 것이 활동성이고 둘째로 중요한 것이 용단을 내는 그 용감성인데 활동성과 용감성을 그것을 활동하지 못하게 붙들어 매는 것이 뭐이냐? 용감성을 뽈끈 눌러 놓으니까 언제 그놈에 눌려서 아무 힘을 쓰지 못하니까 용감을 내지 못하는 그런 것이 다 뭐이냐? 그게 다 죄다. 인간이 몰라 그렇지 인간은 말할 수 없는 잘난 사람인데, 사람은 잘난 존재인데 이 잘난 존재가 다, 이 사람은 밧줄 하나에 매여서 이 사람은 동으로는 가지만 서로는 못 간다. 이 사람은 서로는 가지만 동으로는 못 간다. 이거 이렇게 얽매이는 이것이 이 죄가 들어서 인간의 모든 활동력을 다 완전히 결박시키고 있다. 인간의 용감성을 이 죄가 들어서 다 억압하고 있다 이것을 여기서 가리켜 말합니다.
이러면, 자기를 연구해 가지고서 나는 지금 이 활동성이 어떤 죄에 매여 가지고서 이러냐? 죄라 하는 것은 삐뚤어진 거라 그말이요, 삐뚤어진 거. 인간이 삐뚤어진 것이 다 제거하면, 학교에서 공부하는 그런 게 아니고 다 성경 가운데 보면은 유력한 사람들은 참, 인간의 보통 사람을 탁월한 그런 사람들은 다 공부 안 하고 인간 지식 그거 안 배우고 이래 가지고 하나님 지식만 배워 가지고서 이래 유력한 사람들 있습니다.
이래서, 요 죄가 우리의 모든 용감을, 우리의 이 건설하고 우리가 다 성장하는, 성장의 역사도 건설의 역사도 성공의 역사도, 자기가 점점 자기를 존귀하게 만드는 가치 있게 만드는 역사도 모든 힘은 삐뚤어진 거 이놈이 전부 다 삼키고 있다.
이러기 때문에, 죄라 하는 거는 삐뚤어진 게 죄인데, 국법의 죄도 있고 다 여러 가지 종류의 죄가 있지마는 그런 것은 어느 정도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제일 큰 것이 하나님에게 삐뚤어진 죄가 제일 큰 죄입니다. 하나님에게 삐뚤어지지 안했으면 인간에게는 삐뚤어져도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세상에서는 남한에 삐뚤어진 남한 국법에 위반되는 것도 있고 북한 국법에 위반되는 것 있는데 그것은 다 인간 수평선 이하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에만 삐뚤어지지 안하면 그 인간 법에 삐뚤어진 거는 그까짓 게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법에만 맞추면은 인간 법에 걸릴 때도 있고 안 걸릴 때 있는데 걸리면 걸리는 게 좋소. 하나님 법에 맞춰서 하나님 법대로 되면 인간 법에 삐뚤어진 게 있어. 하나님 법에 맞추면은 남한에 삐뚤어진 거 있고, 하나님 법에 맞추는데 남한에 삐뚤어진 것은 삐뚤어질수록이 좋습니다.
하나님의 법에 맞췄는데 북한에 또 삐뚤어진 것은 삐뚤어질수록이 좋습니다.
삐뚤어지면 그 나라에서는 벌을 줄 것 아닙니까? 그 나라에서 하나님 법에 맞췄는데 저거 법에 삐뚤어졌다고 벌을 줘서 벌을 받으면 그 벌받은 것이 손해입니까 유익입니까? ○○○ 조사님, 유익이요 손해가 아니라. 유익이요 손해가 아니라. 그게 순교자요 다 순생자들인 것입니다.
이래서, 어짜든지 요 죄에 대한 인식이, 하나님의 말씀에 삐뚤어진 것 이게 죄인데. 하나님 말씀에는 둘을 가지라 이랬는데 서이 가져도 지나쳐 삐뚤어진 거, 또 셋을 가지라 했는데 둘을 가진 것은 미달로 삐뚤어진 거, 또 동으로 가라 했는데 서로 간 것은 그것은 치우쳐서 삐뚤어진 것, 서로 가라 했는데 동으로 간 것도 치우쳐서 삐뚤어진 것.
이러니까, 하나님 말씀에 삐뚤어진 이것이 전부 인간의 용기와 모든 건설, 모두 다 승리, 성장, 그 자기의 가치를 좋게 하는 이 모든 것을 다 박살내는 것이 이것이 죄다 그말이오.
요 죄에 대한 인식을 요것을 깨닫고 어짜든지 자기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삐뚤어진 걸 자꾸 회개해서 정리해서 그거 다, 남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저 사람은 고거 하나만 없었으면 좋겠는데, 하나만 없으면 좋겠는데 고거 삐뚤어진 고게 붙들려 가지고서 일생 동안 꼼짝을 못 하고 있다 그말이오.
그래 내가 어떤 장로님한테 가 가지고서 ‘장로님 나는 장로님의 단점을 하나 말해 주면 좋겠습니까?’ 이라니까 ‘한번 말해 보시이소' 그래 말하면서 `그라면 안 고치고 나한테 달라들라고?’ 이라니까 ‘아이고 말해 보시이소. 제가 고칠 거 있으면 고쳐야 안 되겠습니까?’ ‘장로님은 고 자존심이 고게 참 실한 밧줄인데 항상 자존심 고게 걸려 가지고서 자존심에 붙들려 가지고 꼼짝을 못 하는데 이러기 때문에 그 자존심 위주의 사람이 돼 놓으니까 다른 사람이 장로님의 자존심에 걸리는 소리는 안 해 줍니다. 그 밧줄을 완전히 끊어 버리고 벗어나야 됩니다. ’ 이라니까 말하기를 ‘하웃으면서참 나는 죽었으면 죽었지 이거 자존심에 걸리는 거는 못 합니다. ’ 그렇게 말해.
고것도 죽여야 됩니다. 고거 안 죽이는 사람은 항상 마귀란 놈이, 열심히 가라 한다 해도 자존심에 걸리는 일을 딱 거석해 놓으면 ‘아이고, 내가 자존심에 걸려가며 나는 못 가겠다. ’ 자존심이 자기 중에 자기입니다. 고게 악령, 악성으로 되어 있는, 악성은 뭐이요? 악성은 뭐입니까? 원죄입니다. 원죄는 뭐이요? 자기 중심 자기 위주의 고것이 원죄라 그말이오. 원죄이기 때문에 고거 버리기 전에는 평생 제 놀음하지, 그러니까 자기 중심에 걸리지 안할 때만 장 이래 되니까 자기만 기르지 그래 자꾸 칭찬하는 데만 가지 자기 책망하는 데는 가지 않을 것이고, 자기를 대우하는 데만 가지 대우 안 하는 데 하고 멸시하는 데는 안 갈 거라 그말이오.
이제, 그런고로 요것 하나만 알아도,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려야 이제 갈 수가 있지 이걸 벗지 안하고는 못 간다 그말이오. 자기가 암만 힘이 있어 봤자 밧줄을 팔뚝만한 밧줄로 뽈끈 매 놨으면 아마 한국 장사 아니라 세계 장사라도 그 밧줄 끊기 전에는 못 갑니다. 어찌 밧줄 매여 갈 수 있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그 사람이 선천적으로 후천적으로 아무리 실력이 구비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게 걸려지는 이런 죄가 있으면은 그것 때문에 안 된다 그말입니다. 안 된다. 그러니까 요것을 기억하고,
요 경주하는 것도 사람이 몰라요. 달음질하라 하니까 너는 지금 공부를 하고 있기 때문에 공부를 열심히 해라 그게 달음질하는 것이다. 너는 지금 장사하니까 장사를 열심히 해라. 자기 하고 있는 그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그게 달음질해서 성공을 목표하고서 달려가는 것인 줄 그렇게 안다 말이오.
○ 사모, 살은 뚱뚱하게 쪘는데 이거 좀 편하기는 편한 모양인데 엊저녁에 좀 뚜드려 맞아, 세상에 남편한테 종아리 맞는 사람은 저 사람이라. ○○○ 목사 말이오. ○○○ 목사가 저거 마누라를 걷어 서라 해 가지고 종아리를 때린대요.
그 참 그게 아주 독특해. 그래 가지고 저거 시동생만 자꾸 그라고 내가 옆에서 보고 있다 너무 거석해서 ‘그거 어데 그럴 수가 있는가?’ 하니까 떡 뭐라 하는 게 아니라 ‘안 된다. 내가 계집은 자꾸 없으면 새로 얼마든지 주을 수도 얻을 수 있지마는서도 내 형제간은 만들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너보다 형제간을 가치를 높이 둔다. ’ 이래 놓으니까 이거 뭐 꼼짝도 못 하고 시집살이 해. 그게 가정이 된 거야. 그거 참, 맏아들이거든 ○○○ 목사가. 맏아들노릇을 해요. 그래 그 소리를 듣고 ‘그게 참 아주 괜찮다’ 그렇게 봤어요.
경주하는 것도 이렇게 열심히 하는 게 경주하는 게 아니라, 열심히 하는 것이.
경주하는데 경주하는 사람이 향방이 틀렸으면 열심히 뛰면 목표하는 그 향방 상급 주는 데에서 거리가 멀어져요 어째요, 열심히 뛰면? ○○○ 목사님, 바로 향해서 뛰어도 멀어져? 바로 향해서 뛰면 부지런히 뛸수록이 가까워지지. 또 삐뚤어지게, 저리 가야 될 사람이 저리 가서 막 열심히 뛰면은 뛸수록이 멀어지지, 이러니까, 경주를 경주하는 데는 어떻게 경주하느냐 이게 문제라 말이오. 이러면 ‘이 경주하는 데는 열심히만하면 된다’ 이러니까 `그렇다. 열심히 하면 된다. ’ 하는데 열심히 하면 되는 게 아니라.
고 앞에 말하기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는 이이신 예수를 바라보자’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을 향해서 달려야 된다 말이오. 예수님을 향해서 달려야 되지 다른 데 향해서는 달리면 안 돼. 돈을 향해서 달려도 안 될 거고 지위와 명예를 향해서 달려도 안 될 거고 제 행락을 향해 달려도 안 돼.
장가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 목표 어떤 미인을 하나 취할 터이니까 고 목표를 향해서 달리는 것도 아무 소용 없는 거라. 그거 다 망하는 것이지. 예수님을 향하여서 달려야 된다 말이오.
예수님을 향해서 달리면은 어떻게 달려야 되느냐? 예수님은 세 가지로 돼 가지고 있는 예수님이라.
예수님이 세 가지로 성공한 분이요, 영감 성공했고 진리 성공했고 예수님의 대속 성공했고 이 성공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해 놓은 그 성공을 내가 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해 놓은 성공을 그걸 내가 이미 가졌기 때문에 이놈을 뺏기지만 안하면 되는 거라. 뺏기지만 안하고 가면 되는 거라.
이 진리가 우리 진리 아니오. 주님이 이와같이 대속해 주님 때문에 진리가 우리에게 왔지, 이 진리가 우리에게 왔지 그리 아니면, 불교인들 그렇게 충성해도 이 진리를 몰라. 하나님의 뜻을 몰라요. 이런데 만들어 놓은 진리이기 때문에 진리만 내가 뺏기지 안하면 되고 또 영감도 뺏기지 안하면 되고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도 내가 만드는 게 아니라 뺏기지만 안하면 돼.
‘네 앞에 당한 경주를’ 네 앞에 당한 경주가 뭐이냐 하면 자기에게 해당된 현실이라 그말이요, 알겠습니까? 자기에게 해당된 현실에서 거게서 패전 안 하고 이 현실에서도 안 뺏기고 달리고 달리고 이래 가지고서 예수님이 완성해 놓으신 이 세 가지 완성해 놓은 것을 자기도 완성하면 된다 말이오. 이 면으로 힘을 써야 되지 엉뚱하게 힘 써 가지고는 안 된다 그거요.
이것을 깨달은 사람은 이게 이 보배인데 암만 가르쳐 줘 봤자우리 진영에 목사들은 이 참 이상해요. 요번에 날 골탕을 쥐 먹였어. 이 찬송가 서울은 안 써요. 이 찬송가를 너무 찬송가를 사람들이 이 시대에 또 인제 이 찬송가 해 놓은 걸 또 이리 고쳐 버리고 이리 고치고 이리 고치고 자꾸 이거 고치니까 막 빨리 따라가야 돼.
‘자, 이 찬송가 지금 새로 나왔다. ’ 이라면 또 그거는 요리 고쳐 놨으면 또 사고 또 다 쭉 따라오니까 ‘또 고쳤다’ 또 이래 하니까 자꾸 이러면 따라가는 그게 마귀란 놈이 멸망시키는 것인데 이걸 보는 눈이 없다 그말이오! 말을 해도 안 들어! 이래서, 할 수 없다 이걸, 전부 서울은 통일 찬송가를 주장해. 통일 찬송이 제일 썩었소! 찬송가 중에는 개편 찬송이 그런 것도 다 썩었는데 통일 찬송이 제일 썩었어. 통일 찬송보다는 합동 찬송이 낫고, 합동 찬송보다는 이 새 찬송이 낫고, 새 찬송보다는 신편 찬송이 낫고 이거 이래서, 그래 이 찬송가라면 그 사람이 영감받아 지은 것을 그대로 갖다 옮기고 우리가 불러야 될 것 아니겠소? 혹 영감받아서 우리에게 찬송을 지어 가지고서 다 영감받은 사람들이 영감을 받았을 때 영감으로 시를 지은 게 그게 찬송이라 말이오. 영감으로 시를 지은 게 찬송인데 그 사람의 그 영감만치 내가 가야 그 찬송의 뜻을 알 수가 있는 것인데 영감받아 지어놓은 그 찬송을 그 사람이 말을 혹 콩을 팥이라 했라든지 잘못한 게 있으면 고치지마는서도 잘못하지 안 한 것이라면은 그 사람 말해 놓은 그대로 우리가 사용해야 될 터인데 이걸 전부 다 고쳐 놨어.
찬송 지은 사람이 지어 놓은 것을 저는 그 뜻도 알지도 못하면서, 찬송 지은 것은 찬송이 성경에 맞추어서 지은 찬송이요 성신의 감동에 지은 찬송인데 영감 찬송이 아니고 성경대로 진리 찬송이 아니면 그까짓 놈의 노래가 무슨 소용 있소? 이 세상에 유행가를 부르지. 그러면 유행가라, 전부 이 찬송가를 유행가를 만들고 있다 말이오.
이러니까, 대조해 봤어. 대조해 보니까 전부 막 작대기야. 이거 고친 건 다 틀렸어. 고친 건 다 틀렸는데 안 틀린 게 두 개인가 세 개인가밖에 없어. 틀린 거는 여러 수백 개고, 수백 개라. 이래도 이걸 그걸 좋다 하니까 그 사람들은 뭐이냐? 그 사람들은 구원의 실상을 이룰라 하는 사람이 아니고 그 사람들은 어짜든지 이렇게 간판으로, 저거 기분으로 저거 흥미로, 성경은 그렇게 우리가 감정을 일으키는 그런 흥분으로 읽는 것 아닙니다. 찬송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오. 하나님 좋도록 찬송하는 것이지 인간 저 좋도록 찬송하는 게 아니라. 인간 좋도록 찬송하는 그거면 이 세상에 뭐 다른 유행곡을 부르지. 그러니까 이 전부 유행곡을 만들고 있다 말이오. 그 유행가를 좋아하는 인간들에게 그거야 통일 찬송이 좋지.
이러기 때문에 그저, 망할 자는 망할 것만 취하고, 보면 압니다. 저거는 앞으로 환난 오면은 저거는 다 패전자다. 환난 오면 패전자가 심판 앞에 가면 패전자 아닙니까? 심판 앞에 가면 더 패전이지.
그러기 때문에, 실상을 네가 이뤄야 된다. 이 경주하는 것도 실상을 네가, 실상 경주를 해야 되는데 예수님에게 도달하는 경주해야 되는데 네가 어떻게 하면 경주하느냐? 이거 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경주만 잘해 ‘너는 지금 요번에 시험 있으니까 막 시험을 치기 위해서 달음질쳐라. 뭐해라. 세상에 사업을 뼈가 녹도록 해라. ’ 이래 하는 그런 사람들에게는 그런 말 해야 잘 들어지지.
이렇기 때문에, 성경에 주님 말씀하시기를 땅에 속한 자는 땅의 말을 하매 잘듣고 취미 있고 좋아하고 하늘에 속한 자는 하늘의 말을 하매 잘 듣고 취미 있다 이랬습니다. 땅에 속한 자가 하늘의 말을 못 들어요. 하늘에 속한 자들은 땅의 말을 듣기를 싫어해요.
경주하지, 또 그거는 뭐이냐? 예수님이 진리 영감 십자가의 대속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경주하는 건 둘이 가다가서 내가 이기는 것 아니요? 이 경주하는 대적은 끝이 나야 그 대적이 없어지지 밤에고 낮에고 이 경주할 때 경주가 끝나기 전에 대적이 없어집니까 있어집니까? 어때요? 경주하는 경주가 끝나기 전에 대적이 없는 시간이 있어요 없어요? 쉬는 시간이 있어요 없어요? 없어. 이런 경주라.
경주로 표시한 것은 이렇게 쉴 사이도 없고 나와 대립돼 지느냐 사느냐 승패의 결정이 나지 않은 그런 한 토막도 없다 그말입니다. 뭐인데 그게? 주님이 만들어 놓은 거 세 가지. 우리가 주님의 피 때문에 영감이 왔고 피 때문에 진리 왔지 우리가 진리를 찾고서 그란 게 아니라. 이 세상에 사람이 많지마는서도 하나님이 주신 이 진리 신구약 성경을 자기가 자기의 생명길로 알고서 받는 사람 없어요.
이거 다 주님이 해 놨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은혜로 받는 거라.
그러니까, 우리는 진리를 버리지만 안하면 되고 영감을 버리지만 안하고 예수님의 대속을 버리지만 안하면 되는데 이거는 ‘우리 앞에 당한’ 자기 앞에 당한 경주, 자기 앞에 당한 경주라. 자기 앞에 당한 경주가 뭐이요, 자기 앞에 당한 것이 뭐이야? 자기 앞에 당한 게 뭐이라? 현실. 경주는 뭐이라, 경주는? 자기 현실에서 네가 지나 내가 지나 지금 경쟁하는 거, 투쟁하는 것이라 말이오.
투쟁하는 것이 뭐이요, 그 현실에 무슨 투쟁해요? 무슨 투쟁합니까? 현실에서 투쟁을 몇 가지 투쟁합니까, 손가락으로? 세 가지 투쟁해. 무슨 투쟁? 진리를 자기가 만들라고? 영감을 만들라고? 만들어 놓은 거 우리가 어째요? 안 뺏기면 돼. 진리를 뺏기지 말고 영감 뺏기지 말고, 이미 대신 주님이 진리 생활 다 해 놨어. 진리 생활 내 대신 다 해 놨기 때문에 이러기 때문에 대형, 대행, 대화친, 또 대사, 대생, 부활하시고. 이러니까 전부 우리 다 해 놨기 때문에 이 세 가지를 네가 현실에서 뺏기지 마라. 이 현실에도 뺏기지 말고 이 현실에도, 이 현실도 이기고 저 현실도 자꾸 이기고 이기고 이기니까 주욱 이김이 계속을 한다 말이오.
이러니까, 이것을 제가 평생 가도 모른다 그말이오. 모르는데 이거 하나 들었으니까 ‘햐, 대단하다 참 이거 중요하다. ’ 이럴 건데 이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자꾸 듣기 싫어해. 듣기 싫어서.
이 경주는 세 가지로 해야 되고, 그다음에 하나 네째로 깨달을 것은,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음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러면 보좌 우편에 앉은 보좌는 결과이고, 보좌는 결과 아니요? 보좌 우편에 앉은 거는 결과고 또 십자가 지는 것은 현실 아닙니까? 현실과 결과가 영 판이하다 그말이오.
그런데, 예수님은 현실보고 현실에 맞춰서 살았습니까 결과를 보고 결과에 맞춰 살았습니까? 뭐이요? 예수님은 결과에 맞춰 살아. 이러니까 네가 범사에 살 때에 현실에 맞추지 말고 결과에 맞춰서 살아라. 너는 항상 결과에서 현실 생활해라.
‘이라면 결과가 어찌 되나, 이라면 결과가 어찌 되느냐?’ `결과야 어찌 됐든지 이래야 우선 좋으냐 저래야 좋으냐?’ 너는 현실에 맞추어 살든지 결과 맞추어 살든지 둘 중에 하나이니까, 예수님은 결과에 맞추어 살았다 하는 고것을 여기서 지금 우리가 배워야 되겠습니다.
또, 그라고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지 않기 위하여 죄인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그러면 예수님이 그 많은 사람들이 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과 예수님이 하신 것은 정반대입니다. 정반대요.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께 대해서 정평하지 안했고 정가하지 안했고 예수님에 대해서 전부 억울한 소리만 했고 애매한 소리만 했고 정죄만 했고 전부가 다 이랬어. 예수님의 애매한 소리 정죄받고 억울한 걸 손해보는 걸 전부 예수님은 인간들에게 손해본 것뿐이지 유익본 거 하나도 없다 말이오. 손해본 것뿐이라.
손해본 것뿐인데 ‘너는 알뜰히 정당방위해 가지고서 손해보지 말고 알뜰히 물샐틈 없이 살아라’ 마귀란 놈이 요래 말한다 말이오. ‘네가 왜 남한테 손해봐? 손해보지 말고 물샐틈 없이 살아라’ 이랬는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도 유익은 못 보고 전부 손해만 다 봤다. 손해만 다 봤다. 손해만 다 봤는데 손해 다 보는 것은 위에 계신 이 크신 분이 계시기 때문에 그분을 생각하고 그분을 위해서 그분 좋아하도록 손해보는 길을 취했다.
인간들은 위에 걸 보지 안하고 일대 일로서 어짜든지 ‘왜 내가 너한테 억울하다’ 정당방위로, `네가 이렇게 틀리지 안했느냐?’ 이렇게 정당방위로 이와같이 하니까 알뜰한 것 같고 여문 것 같고 했지마는서도 위에 있는 분을 몰랐다 그말이오.
그러니 너거들에게는 위에 계시는 분이 있기 때문에 위에 계시는 분 그분이 솜씨 있고 능하고 부자이기 때문에 너거 가난한 거 일대 일로써 고게서 그 사람에게 네가 일대 일로 해 가지고서 아무리 네가 이겨 봤자 수입이라 하는 것도 적고 승리의 전공도 적고 이렇지마는서도 위에 이분을 생각하고 이분을 위해서 이분이 좋아하시도록, 이분이 이것들을 구원하기로 했기 때문에 네가 이렇게 안 하면 그를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전부를 손해 다 봐라.
그러면 손해 다 보고 나니까 하늘에 있는 권세와 땅에 있는 권세를 다 내게 주셨다 이랬다 말이오.
이러니까, 이제 인인 관계가 인간대 인간으로 살지 말고 인간을 대할 때에 인간의 배경이 되어 있고 인간의 주인이 되어 있고 그 인간에게 네가 어떻게 하느냐? 그 인간에게 네가 손해 봤으니까 나는 네게 손해 보겠다. 그 인간에게 네게 있는 것 다 뺏겼으니까, 뺏겨도 좋은 마음으로 뺏겼으니까 내게 있는 것 내가 너한테 다 뺏기겠다. 이제, 이것에게 인간에게 주니 주님 내게 받는 요 비결을 깨닫고 난 다음에 너희가 살아라 하는 것이라 그말이요, 알아 듣겠어요? 이러니까, 바로 깨닫지 안하면은 헛일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