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21 13:26
4가지 다해 주와 이웃을 사랑하면
1987. 7. 3. 밤 <금>
본문:누가복음 10장 25절∼37절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여기에 이 율법사가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영생 구원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물을 때에 예수님께서 그 율법사와 말하시면서 “네가 성경을 어떻게 읽었느냐?” 하니까 이 율법사가 말하기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이렇게 대답하니까 예수님께서 그 대답이 바로 됐다고 그렇게 칭찬했습니다.
그라니까 또 율법사가 자기의 대답이 옳다고 주님이 인정하시니까 또 자기의 그 옳은 것을 더 드러내기 위해서 “그라면 내 이웃은 어떤 사람이 이웃입니까?” 이렇게 또 물었습니다.
물으니까 예수님께서 이 비유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그 도중에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가지고 강도들이 옷도 다 벗기고 때려서 거반 죽게 된 것을 버려두고 그만 가 버렸는데 그 뒤에 제사장이 하나 지나가다가 그 형편을 보고 그만 자기는 살며시 피해서 가 버리고, 또 그 뒤에 레위 사람들도 지나가다가 그 광경을 보고 그만 가만히 둬 두고서 피해서 가 버리고,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가다가 불쌍히 여겨서 자기에게 가진 것, 지금 아주 구타를 당해서 많이 상해 가지고 있으니까 그 사람에게 필요한 기름으로 바르기도 하고 또 포도주로 이렇게 씻어서 소독도 하고 이렇게 치료해 가지고 빈들판이니까 자기가 탔던 그 짐승에 환자를 태우고 주막에 가 가지고 돌봐주고 이렇게 간호를 하고 자기가 볼일이 바빠서 가면서 ‘이 사람을 잘 돌봐서 치료해 달라’ 하면서 돈 두 데나리온을 맡기면서 부탁을 하고 떠났습니다.
말하기를, 내가 돌아올 때에 이 비용이 모자라면 모자란 것은 내가 더 채워 줄 터이니까 잘 돌봐서 간호를 해 달라고 그렇게 부탁을 하고 갔다고 이렇게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고, 그 청년에게 묻기를 “그러면 네가 생각하기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과 사마리아 사람 이 사람이 그 강도에게 큰 상함을 받은 그 사람을 만났었는데 어느 사람이 이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겠느냐?” 이렇게 반문을 했습니다. 그라니까 그 율법사가 “자비를 베푼 그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습니다” 이렇게 대답하니까 주님이 옳다고 또 칭찬하시고 “너도 가서 이렇게 행해라” 이렇게 부탁하신 것을 여기 기록했습니다.
여게 그러면 내 이웃은 누가 내 이웃이 되겠느냐 이렇게 하는 이웃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이 이웃이라는 것은, 이웃이라는, 제가 생각한 데는 이웃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을 가집니다. 이웃은, 사람은 사람의 종류인데, 사람은 사람의 종류이기 때문에 사람이 그 동무가 되고, 사람이 동무가 되고, 또 유가 되고, 사람은 사람대로 그 동류가 되기 때문에 서로 같이 모여 살고 협동하고 협조하고 그러는 것인데 그 이웃이라는 것은 사람은 사람이 사람 이웃이 된다. 사람은 사람이 사람 이웃이 된다.
그랬는데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고 “이 세 사람 가운데에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은 누가 이웃이 되겠느냐” 하니까 “자비를 베푼 사람이니이다” 할 때에 예수님께서 그 대답이 옳다고서 칭찬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제사장은 그때에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니까 대개는 이스라엘 사람인데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원하는 그 책임을 진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은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직책을 가진 사람들이라 이렇게 할 수 있는 성직을 가진 사람들이요 또 레위 사람들은 제사장 족속으로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는 족속들이라 하는 지파들이라 하는 그 지파에 소속한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러고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스라엘과 서로 대립이 되어 가지고서 말도 하지 않고 그렇게 아주 원수같이 지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유대인들이 갈릴리나 그런 데를 갈라고 하면은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안하고 저 다른 길로 둘러서 가고 사마리아에 통과도 잘 안 합니다. 그렇게 아주 원수같이 대하고 있는 그런 관계입니다. 그러나 그 불한당 만난 사람을 보고 자비를 베풀어서 구원한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이 우리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구원하실 그것을 친히 이 비유로 암시해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거게 대해서는 오늘밤에 해석할 시간이 없고 오늘밤에 증거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러면 그 두 사람은,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그 사람은 그 이웃이 되지 못한 사람이라, 그 사람은 불한당 만난 사람의 이웃이 아니라, 이웃이 아니라 그 말은 극단으로 말하면 그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 종류가 아니라, 그거는 사람이 아니라 하는 그런 말이 이 속에 깊이 파고 보면은 들어 있습니다. 그는 사람 아니고 사람을 해치는 그런 사람의 원수나 이런 해하는 대적이나 그런 것이지 사람 유에 들지는 못했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이래서 제가 오늘 저녁에 말하는 것은 어짜든지 우리는 모든 사람을 대할 때에 모든 사람은 내 이웃이요, 내 이웃이요 나도 모든 사람의 이웃이라.
우리는 사람에게 이 제사장과 레위 사람같이 그렇게 이웃이 되어지지 못한, 이웃이 되지 못한 이런 참 이거 똑똑히 해석을 하면은 비참한 사람인데 이렇게 이런 사람이 되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대한 이웃이 되어져야 되겠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져야 되겠고, 주님 앞에 ‘너는 사람의 이웃이 아니라’ 이웃이 아니라 하는 그것은 사람의 적이요 사람의 원수요 사람이 아니라는 이런 아주 무서운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밤에 이 말씀을 봉독한 것은 우리는 모든 사람에 이웃 노릇을 하지 못했던 우리의 과거를 회개하면서 모든 사람의 이웃이 되자, 모든 사람의 이웃이 되자 하는 요것을 첫째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떤 사람이든지 뭐 동양 사람이나 서양 사람이나, 자기 민족이나 타민족이나, 또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건강한 사람이나 병신이나, 아주 비참한 자나 존귀한 자나 어떤 사람이든지 나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을 대할 때에 사람의 이웃이 되자, 사람의 원수가 되지 말고 사람의 이웃이 되자 하는 이웃이 되자는 그것을 첫째 말을 하나 하고 싶습니다.
이웃이 됐는데 그 이웃에 대해서 이웃 노릇을 어떻게 했는가? 이웃 노릇을 이 사마리아 사람은 이웃 노릇 할 때에 그 이웃된 그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여 불한당 만나 가지고 많이 상해 가지고 있을 때에 자기로서 그 이웃의 어려움 당한 그것을 도울 수 있는 그런 그 힘과 자기에게 무슨 그런 요소가 있을 때에 그것을 애끼지 안하고 자기 것을 기울여서 이웃을 도왔다 하는 그것을 여게 기록했습니다.
그러면 상해 있는 사람이니까 포도주로 가지고서 소독을 해서, 그 모든 병균들을 소독을 해서 해야 되겠고, 또 자기에게 있는 기름을 발라 가지고 유하게 해서 뭐 방부제로 이 모두 앞으로 썩지 안하도록 방부하는 그런 치료를 해야 되겠고, 또 빈들판이니까 자기는 뭐 그 사람을 업고 갈 수도 없고 이러니까 빈들판이니 주막이 먼데 자기 탔던 짐승에게 태우고 자기는 걸어서 이래 가지고 간호할 수 있는 그 주막까지 인도했다, 또 주막에 인도했지마는 그 사람들이 그 사람을 잘 돌봐 줄란지 안 돌봐 줄란지 그거 또 남이 데려 놓은 것을 그 사람들에게 짐을 지우지 안하고 자기가 짐을 질 수 있는 데까지는 돈 은전 두 데나리온이 있으니까 두 데나리온을 주면서 ‘이 비용이 모자라면 내가 돌아올 때 뒤에 갚아 줄 것이고 하니까 이 비용이 되는 대로 해서 간호를 해 달라’ 그렇게 한 그것이 이웃 노릇 한 것이라. 이웃 노릇 한 것이라.
그러면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의 이웃이 되어야 한다. 주님께서 “사람의 이웃이 되어야 한다” 말씀하시기를 “영생을 얻는 데에는 네 모든 것을 다해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이렇게 말씀하신 이것이 주님의 계명이기 때문에 주님을 사랑하는 것도 영생 얻는, 우리 구원 얻는 조건이 됐고 또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구원 얻는 조건이 됐으니까, 그러면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주님의 명령을 복종하는 것으로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요,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거게 대한 결과의 자기에게 효력이 돌아오는 것은 영생이라 그렇게 말씀했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사람을 내가 내 이웃으로 삼지 못했던 그 모든 죄를 회개하고 어떤 사람이든지 모든 사람은 내 이웃이라, 모든 사람을 내 이웃으로 알지 못하고 저 사람은 나와 상관이 없는 사람으로 생각했던 요 죄를 회개하고 모든 사람은 내 이웃인 것을 깨닫고 이제 모든 사람을 내 이웃으로 삼아서 살아야 되는 요것을 우리가 하나 작정을 해야 하겠습니다.
이제 모든 사람은 내 이웃이라, 이웃이라도, 사람은 사람이라도 사람 이웃이 아닌 사람이 있다. 사람은 사람이라도 사람 이웃이 아닌 그 사람은 아주 그것은 하나님 앞에 다 쫓겨나고 아주 하나님 앞에 진노를 받을 사람이라, 사람이 사람 노릇 하는 데에는 사람이 사람의 이웃이 되어야 된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나는 무관심하고 생각했지마는 모든 사람은 내 이웃이라. 내 이웃이라, 내 동류라, 또 나와 하나되어 가지고서 이 하나되어 가지고 사는 것이라.
마치 말하면 한 몸에는 여러 지체가 있지마는 그 지체가 다 한 몸에 속해 가지고 있는데 그 모든 지체가 모든 지체에게 없어서는 안 되고 그게 필요한 것처럼 인간이라는 것은 인간으로서 인인 관계를 가지고서 인인 상호 협조로 가지고 이와 같이 살 수 있는 것이 인간인데 이제 우리가 사람을 자기 이웃으로 생각지를 못하고 자기와 관련 없는 사람으로 생각했는데 모든 사람은 다 자기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은 자기 이웃이라.
호랑이는 호랑이가 이웃이요, 또 맹수는 맹수가 저거 이웃이요, 우리 사람은 사람이 우리 이웃이라. 그러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내 이웃이라 하는 요것을 우리가 깨닫고 확정을 짓고, 그러면 이웃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웃에 대해서는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계명에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 그것이 이웃에 대해서 정당한 행위라. 그러면 모든 사람은 내 이웃이라, 그러면 이웃에 대해서 내가 행할 정당한 행위는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 그것이 정당한 인간 행위라, 요것을 우리가 생각하고 작정을 합시다.
그랬는데 거게 사마리아 사람이 사랑한 것은 그 불한당 만난 자에게 자기로서 할 수 있는, 그 불한당 만난 사람이 자기가 자기 일을 하지 못하고, 자기가 자기 치료를 하지 못하고, 자기가 자기의 그 어려움 당한 데에서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그 모든 것을 사마리아 사람이 자기에게 있는 걸 가지고 도울 수 있는 그런 것은, 자기에게 있는 걸 가지고 도울 수 있는 것은 하나도 꺼리지 안하고 애낌없이 다 들여서 도왔다 하는 것을 여게 보여 줍니다.
요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해서 구원하신 것을 여게 표현했는데 그것은 지금 말하지 않고 어쨌든지 우리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람으로 나게 해 주신 여게서 내가 사람으로 났기 때문에, 나는 사람이기 때문에 택자나 불택자나, 믿는 자나 안 믿는 사람이나, 원수나 뭐 친한 사람이나, 또 먼 데 사람이나 가까운 사람이나, 민족이나 지방이나 상관없이 나는 사람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내 이웃이라 하는 요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해 주신 정상적인 이 법칙입니다.
그런고로 모든 사람을 내 이웃인 것을 깨닫고 모든 사람을 내 이웃으로 이렇게 확신을 가지고 확정을 하고, 확실히 정해 놓고.
그러면 이웃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웃에 대해서는 나보다 나은 사람은 내가 좋은 그것을 축하하면서 자꾸 더 좋아지기를 우리가 축하해야 되겠고, 나만 못해서 나만 못한 사람이 있으면은 내게 있는 걸 가지고서 도와서 나와 같이 이렇게 동등이 되도록 자꾸 돕는 그런 일을 하고, 또 그 사람이 어려움을 당해 가지고 있으면은 그 어려움을 내게 있는 걸 가지고서 도와서 그 어려움에서 구출할 수 있으면은 구출을 하는 것이 이웃에 대한 정당한 행위다 하는 그것을 여게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과거에 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할 때에는 세상에서는 언제든지 다른 사람을 배척하는 배타적으로 살았고, 또 모든 사람을 자기를 위해서 이용하는 이 착취 성질로 살아왔던 우리들인데, 이제 하나님의 도리를 배우고 난 다음에는 이 사랑의 법칙을 배워서 우리가 과거 살던 그 생애 법칙과는 아주 다른 법칙을 가지게 됐습니다.
그러면 사랑의 법칙은 생명의 법칙인데 이것은 내게 있는 것으로서 없는 사람, 내게 평안을 가지고 어려움 당한 사람을 돕는 것이 사랑의 법칙이요 생명의 법칙이요, 사망의 법칙은 약하고 어려움 되어 있는 그 사람 약자이기 때문에 그것을 착취해서 내가 나를 더 부강케 하는 그런 데에 이용하는 그것이 사망의 법칙이요 미움의 법칙이요 마귀가 주는 법칙이요 서로 내게 있는 것을 가지고서 돕는 그것이 사랑의 법칙입니다.
이러니까 갑작스럽게 이렇게 생애 법칙이 달라지니까 우리가 마음으로는 생각을 가지지마는 막상 실상을 당해서 할라고 하면은 인색한 마음도 들고, 또 교만한 마음도 들고, 여러가지로서 염려가 생겨서 그 일을 활발스럽게 하지 못하는 우리들입니다.
거게 대해서 출애굽기 20장 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고 했으니까 이 천 대라 하는 것은 이거는 뭐 무한한 숫자를 표시해서 성경에는 보면 천이라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는 무한히 영원히 축복해 주신다 하는 그런 말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이 일, 이웃 사랑하는 데에 자기 몸과 같이,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 자기 몸은 자기가 어짜든지 보호해서 몸을 잘 보호하고 기르는 이것이 본능인데 그와 같이 모든 이웃을 자기가 잘 자기 힘 있는 데까지는 보호하고 길러서 자기가 자기 몸에 대해서 하는 거와 같이 그렇게 이웃에 대해서 그와같이 하는 것이 이것이 영생 얻는 길이라, 영생 얻는 길이라.
이랬으니까 영생을 얻는 데도 이게 필요하고, 영생 얻는 데도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 영생을 이루는 데도 필요하고 또 하나님의 이 전적 축복을 받는 데도 필요하고 이라니까 이 세 군데 필요합니다. 세 군데 필요합니다.
필요하고, 또 말씀하시기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들이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 말을 너희에게 하는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서 충만케 하기 위해서 내가 이 말을 한다. 그러면 내 계명은 어떤 것이 내 계명이냐? 내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들끼리 서로 사랑하는 것이 내 계명이니라.” 또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이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하는 요 행위가, 그러면 자기 몸에는 보면, 몸에는 보면 제일 병들어 있는 그 자리에 온 몸이 전부 집중해 가지고서 치료를 하고, 그러기 때문에 건강한 것은 약한 데를 돕고 또 약한 것은 건강한 것의 혜택을 입어서 건강을 회복하면은 회복하고 난 다음에 또 약자를 돕고, 요 한 몸에 여러 지체가 있어서 자기 몸을 자기가 돕는 요 방식은 우리가 뭐 다 알고 있는 방식이기 때문에.
자기 몸을 자기 몸이 도와서 이렇게 잘 돕고 기르는 보양하는 것은 이건 잘 아는 법칙이기 때문에 뭐 성경에 읽을 것이 없이 그만 자기 몸을 자기가 사랑해서 잘 보호하고 기르는 이것은 다 우리가 본능적으로 다 하고 있는 법칙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요 법칙대로 하는 것이 영생을 이루는 유일한 조건이 되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요거 해야 되겠고, “영생을 이루는 데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하는 것이라”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영생하는 것이, 영생하는 그 능력이, 영생하는 지혜가, 영생하는 그 기능이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하는 그 기능이 아니라면, 그것이 아닌 기능이라면, 그게 아닌 기능이라는 그거는 영생하면 큰일나겠습니다. 안 그렇겠습니까? 영생하면 큰일나겠고,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하는 그 기능, 그 기능, 그 본질 본성, 그 실력 요것은 영생할 수 있겠고 영생을 해야 되겠습니다. 또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것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것도 영생할 수 있는 것이 되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치 않는 그것을 그게 영생하면은 하나님하고 시비 붙을 터이니까 마지막에는 뭐이 깨져도 깨질 것 아닙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하는 요 요소라야, 요 본질과 본성이라야 요것이 영생하지 그 본질과 본성이 아니면 영생할 수 없다 하는 것을 여게서 우리에게 말씀해 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까지에 이 세상 사망법에 속해 가지고서 사망법으로 살았던 우리들이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들으나 좀체로 시작하기도 어렵고 또 계속하기도 어렵고 하기가 어렵습니다.
어려우나 요것이, 어려우나 하나님이 이와 같이 하면은 좋다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속이는 말씀이나, 꾀우는 말씀이나, 거짓말이나, 뭐 해하는 말 이런 말 안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하나님 말씀하신 요 말씀을 믿고 한번 시작해 보자는 것입니다. 한번 시작해 봅시다.
한번 시작해 보는데 안심할 것은 뭐이냐? 왜 시작해야 되느냐? 그렇게 안 하고 전부, 열 명이 모으면 열 명이 다 모두 ‘내가 어짜면 저 아홉을 삼켜 가지고서 내가 지금 내게 유익을 보겠느냐?’ 열이 모았으면 열이 각각 제 서로 서로 아홉을 잡아 삼켜서 제가 밥을 삼아 먹을라고 하는 것이 이것이 세상인데, 이런 세상에서 이거 이웃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한다는 이것이 ‘이거는 하나의 궤변의 논리뿐이지 실상은 그 될 수가 없는 일이다.’ 이러기 때문에 모두 시작을 안 하는데 하나님이 이라면 복되다 했으니까 시작하는 사람은 복을 받습니다.
시작하는 사람은 유익을 봅니다.
그런데, 그러면 그렇게 시작하면 무슨 유익을 보는가? 그렇게 시작하면 첫째로 영생을 자기가, 영생을 자기가 이룬다. 그렇게 하는 그것이 영생이라. 그러면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는, 모든 것 다해서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하는 그 사랑 그것이 영생이라. 사랑 그것이 영생하는 그 실력이요 그것이, 그렇게 함으로 영생을 얻는 게 아니라 그렇게 하는 그것이 영생하는 그 자체요 본질이요 본성이요 그것이 곧 성공이라.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래도 이 세상에서 뭐 이런 걸 저런 걸 인색한 것이 많고, 아까운 게 많고, 어려운 게 많고, 뭐 아쉬운 게 많고, 별별 좋은 거 행락이 많지마는 그 모든 것의 마지막은 사망인데 사망 아니고 영생은 요게 되어야 영생이지 요게 아니면 다 영생 못 하고 다 사망이니까 아무리 좋아봤자 사망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천하를 다 내것 만드는 그 방법으로 가지고서 막 승리 도취를 했다 할지라도 사망이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이러니까 이 생활하는 것이 이것이 어렵게 보이지마는 거짓말 하지 안하시는 하나님께서 “이것이 영생 자체라, 이것이 영생을 이루는 것이라, 그 실력이 영생 실력이라.” 하니까 아무래도 우리가 영생 실력을 이루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이거 해야 되겠고, 또 해야 될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복 준다” 하나님이 복 주니까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는 것도 하나님이 복 주심으로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고, 하나님이 복 주심으로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고, 또 위에만 있고 아래 있지 안하고, 머리되고 꼬리되지 않고, 또 꾸어 줄지라도 꾸지 안하고, 이러니까 하나님이 복 주시면 뭐 모두가 하늘에 창고를 여시고 마구 쌓을 곳이 없을 만치 들이 부어 준다 하니까 이제 자본에 대해서 염려가 없다 말이요, 자본에 대해서. 자본에 대해서 염려가 없어. 아무리 주고 주고 해 봤자 하나님이 주시니까, 예를 들어서 농사 짓는 사람이 자꾸 가물어 가지고 논이 말라 가니까 이웃 사람에게 자기 논에 들어오는 물을 조금 양보해서 이렇게 좀 대줬다 할지라도 그거 얼마 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늘에 비를 쏟아 부어 주면 막 온 들판이 그만 물 뭐 물 소가 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거 째째한 거 이것 이래 가지고 조그만 것 가지고서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하는 요 계명을 지키면은 하나님께서 막 천 대까지 복을 준다 하니까, 천 대 까지 복을 준다 했으니까 뭐 당대 복이야 으례히 풍성할 것 아니겠습니까? 이러니까 자본에 문제가 없다. ‘이웃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하는 데에는 이 자본이 떨어지면 어짤까?’ 자본 염려할 것이 없다.
또 그 자체가 영생이기 때문에, 영생이기 때문에 그보다 더 좋은 게 없다. 해야 되겠다.
또 요한복음 15장에 말씀한 것을 보면은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들이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너희들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충만케 하려 함이라” 내 기쁨이.
그러면 그 계명이 뭐인데? 그 계명은 요한복음 15장 12절에 보면은 “내 계명은” 너희들이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는 내 계명은 다른 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들이 서로 사랑하는 이것이 내 계명이라” 또 그렇게 말씀했어, 내 계명이라 그래 말씀했어.
이러니까 이 이웃 사랑하는 이게 또 예수님의 그 기쁨, 예수님의 기쁨. 그 기쁨은 영원한 기쁨이요 완전한 기쁨인데 예수님의 기쁜 그 기쁨이 우리 속에 있어서 우리 기쁨으로 충만하다 하니까 뭐 기쁘고 즐겁고 충만하면 됐지 또 딴거 뭐 모자랄 게 뭐 있겠습니까? 그래서,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킨다는 그 계명이 무슨 계명인가? 그 계명이 보면 곧 그 계명은 옛 계명이요 새 계명인데 그 계명은 뭐이냐? 그 계명 전부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형제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명이라.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 사랑하는 그 외에는 뭐이냐? 그 계명 지키는 것이라, 계명 지키는 것. 계명 지키는 건 뭐이냐? 이웃 사랑하는 것이라.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그 말은 다른 말로 하면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하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복 주신다” 하는 이 계약이라 말이오. 이 계명이요 계약입니다.
이러기 때문 자본도 문제가 없지, 또 그렇게 사는 그 생활에 본질 본성 그 자체가 영생이기 때문에 영생이면 제일이지, 영생이라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모든 것을 이긴 힘이라 그말이오. 영생이라 말은 영원히 승리하는 힘이라 그말입니다. 이러니까 영생은 하나님에게 속했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만 속했지 딴거는 다 이기는 것이오. 영생은 모든 피조물은 다 통치하고 다 이기는 것이 영생이라.
영생이라 말은 영원한 능력이라. 모든 피조물과 상대할 때 어떤 피조물들이든지 다 승리하고 하나님에게 속하여 승리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제 힘 되고서 모든 것은 다 복종하고 다 통치할 수 있다 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자,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하는 요것이 영생하는 그 영생하는 지극한 능력이라, 영원한 능력이라, 영원한 힘이라, 영생이라, 그 자체가 영생이라.
하나님에게는 그것이 속해 가지고 그분에게 순종함으로 그분으로 인해서 영생하는데, 그분으로 인해서 영생하는데 피조물은 다스리고 하나님에게는 완전 복종하니 그게 영생이고 피조물은 완전 다스리는 영생이고, 영생이니까 할 만합니다.
또 자꾸 이렇게 할라 하면 자본 문제가 들겠는데 자본 문제는 하나님께서 천 대까지 복을 주신다 했으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복 주시니까 자본이 모자라서 염려될 것이 하나도 없다 그거요.
또 그 생활 하는 데에는 그러면 그 생활 하는 데에 기쁘지 안하면 어떻게 되겠느냐? 그것은 예수님의 기쁨이 우리 속에 있어서 우리 기쁨이 되어서 충만하다 했으니까 뭐 사람들의 최종적인 최대의 행복은 쾌락인데, 쾌락인데 예수님의 쾌락을 우리가 가지니까 그보다 더 이상 행복된 게 없다 말이오.
이러니까 아무리 따져봐도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하는 이 일을 안 할 필요가 없고 못 할 이유가 없습니다. 못 할 이유가 없고 안 할 필요가 없고. 모두 마귀에게 우리가 속해서 꼬임받아 가지고 어리석어 이렇지 이웃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하는 거 이것보다 피조물에게 대해서는 제일 복된 생활이 없고 또 하나님 사랑하는 이보다 더 복된 생활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밤에 이 말씀 봉독한 것은 이제 하나님 사랑하는 것이 내나 이웃 사랑하는 거라. 하나님 사랑하는 것이 뭐이 사랑하는 겁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어떤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라 했습니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 사랑하는 거라 했어. 하나님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 계명 지키는 것이 하나님 사랑하는 것이라 했어. 하나님의 계명은 뭐인데? 너거끼리 서로 주님이 나를 사랑하심같이 사랑하라는 그것이 내나 이 계명이라.
이러니까 이것은 하나님 사랑하는 게 이웃 사랑하는 것이요 이웃 사랑하는 게 하나님 사랑하는 것이요 하나님 사랑하는 게 계명 지키는 것이요 하나님 계명 지키는 것이 이웃 사랑하는 것이라. 이와 같이 똘똘 뭉쳐서 하나라.
이런 오묘의 이 도리를 우리에게 주셨으니까 우리들이 이제부터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같이 하기로 한번 작정해 보자. 이거 한번 작정해 봐요.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같이 하자. 아이구 그라면 사랑할라 하면 자본이 모자라 어짤까? 자본이 모자라 어짤까? 자본은 당신이 축복으로 해 준다 했기 때문에 자본이 모자랄 이유가 없어.
이러기 때문에 구세군 창설자 그분이 나서 가지고서, 빈손 쥐고 나서 가지고 이웃 사랑하는 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하는 요 생활 하는 데에서 전부 다 했는데 ‘역사에 물질 가지고서 인간 구제한 것은 이 윌리엄 부으드라 하는 구세군 창설자보다도 더 물질 가지고 인간들을 사랑하는 데에 구제 자선 사업한 것은 윌리암 부으드보다 더 많은 액수를 한 사람이 없었다’ 그것을 제가 그 통계를 지금 한 삼십 년 전에 봤는데 그 후는 통계가 어찌 됐는지 그때까지는 통계에 윌리암 부으드보다도 더 구제 액수가 많은 사람이 없었다 하는 것을 통계를 내 가지고서 내놓은 걸 제가 한번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이러니까 이제 ‘이웃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하면은 나는 어짜고?’ 이렇게 염려하지 말고, 자본은 하나님이 축복으로 준다 했기 때문에 뭐 무진장이니까 염려하지 말고, 또 그 자체가 영생이기 때문에 그보다 더 좋은 게 없으니까 또 우리가 해야 되겠고, 그렇게 하는 것이 최고의 그 쾌락을 누리는 것이 되기 때문에 또 우리가 해야 되겠고, 한번 해 봅시다. 이웃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한번 이것을 이제 시작해 가지고 실천해 보자고요.
자, 자본도 문제가 없어. 또 그 자체가 영생하는 완전 실력이라. 영생이라 말은 모든 것을 승리한 실력이라 말이오. 생명이라 말은 능력이라 말이오. 힘이라 말입니다. 영생이라면 영원한 능력이라 그말이오. 자, 영생이라, 또 예수님의 그 쾌락, 예수님이 최고의 쾌락을 누렸는데 그 쾌락을 누리는 것이 이웃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하는 것이라.
이러니까 자, 이제부터는, 이제부터는 내게 있는 것 가지고서 한번 담대히 한번 해 봐요. 언덕을 떠나서, 겁내지 말고 언덕을 떠나서 한번 하나님 말씀을 믿고 한번 이 생활 한번 시작해 보자고요.
한번 해 가지고 이 생활 시작해 가지고서 한번씩 해서 이 맛을 보고 난 다음에 이제는 언덕을 떠나서 창파에 배를 띄우고 하나님의 이 한없는 사랑 속에 자기를 드부렁 띄워 놓고서 이 생활 하는 데에서 경험하고 체험해 가지고 담대히 이 생활 할 수 있는 사람이 서부교회서 하나 나고, 둘 나고, 서이 나고, 너이 나고 자꾸 나게 된다면은 하나님께서 막 복을 이래 쏟아 줄 것이고 한국에 쏟아 줄 것이고 이거 참 큰 행복의 이 유일한 구멍이 우리에게 나왔는데 이게 있는데 이 구멍을 우리가 찾지를 못했어. 찾지 못하고 공연히 옹졸하게 떨고 있어.
이러니까 자기의 마음과 목숨과 그 힘과 뜻을 다해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사랑하는 이 일을 한번 단정코 한번 출발해 보자고요. 한번 출발해 봐요. 이미 죽을 것 한번 망할 요량하고 한번 해 보지. 망할 요량하고 한번 해 봐. 몇해 해 봐요. 해 보면 그다음에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있을 거라 그말이오.
이러니까 자, 이렇게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하셨나이다” 요 27절인데, 27절. 누가복음 10장 27절. 자, ‘누가복음 10장 27절 이 시간부터 한번 해 보자!’ 하고서 담대히 한번 해 보기로 작정하는 사람은 손 한번 들어 봅시다.
햐, 할렐루야.
따라해.할렐루야!할렐루야!할렐루야!이거 하면 돼, 할렐루야야.
이제 ‘누가복음 10장 27절 오늘부터 단절하고 한번 시작해 보자’ 하고서 한번 해 봅시다. 그래 이렇게 하는 사람들 다 승리했습니다. 옹졸하게 하지 말고.
찬송 한번 합시다. ‘내 주 하나님’ 없습니까? 그라면 136장입니다. 새찬송 430, 통일 408.
이 찬송 하면서, 언덕을 떠난다는 말은 자기 주관을 떠난다 말이요, 자기 주관.
자기 주관을 떠나서 이제 하나님 말씀을 따라서 나가는 것입니다. 한번 이 찬송 한번 힘있게 한번 해 봅시다.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저 큰 바다보다 깊다 너 곧 닻줄을 끌러 깊은 데로 저 한 가운데 가 보라 언덕을 떠나서 창파에 배띄워 내 주 예수 은혜의 바다로 네 맘껏 다녀보라 왜 너 인생은 언제나 거게서 저 큰 바닷물을 보고 그 밑 모르는 깊은 바다 속을 한번 헤아려 안 보나 언덕을 떠나서 창파에 배띄워 내 주 예수 은혜의 바다로 네 맘껏 다녀보라 많은 사람이 앝은 물 가에서 저 큰 바다 가려다가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 보고 맘이 조려서 못 가네 언덕을 떠나서 창파에 배띄워 내 주 예수 은혜의 바다로 네 맘껏 다녀보라 자 곧 가거라 이제 곧 가거라 저 큰 넓은 바다 향해 자 곧 네 노를 저어 깊은 데로 가라 망망한 창파로 언덕을 떠나서 창파에 배띄워 내 주 예수 은혜의 바다로 네 맘껏 다녀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