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20 01:28
15단계 도리
본문: 요한복음 9: 35-47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예수님께서 가라사대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가로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다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지난번에 이 말씀을 증거한 일이 있습니다. 나면서부터 소경으로 난 이 사실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성경은 영감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보여 주시는 하나님의 선포며 또 계약입니다.
여러모로 복잡한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신앙을 바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라는 것은 단계적으로 자라 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당장에 무엇이 되리라고 그렇게 생각을 가지나 사람 생각대로 그렇게 당장에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순서 순서를 밟아서 그렇게 신앙도 자라가고 구원도 이루어지는 것이지 그 순서를 밟지 않고 사람이 일조 일석에 무엇이 되어보리라고 몇 십일 며칠동안에 무엇이 되어보리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다 인간의 욕심에서 나온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한 시대에 있는 일이라고 해서 그 후 세대도 그와 같은 일이 꼭 있으리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안됩니다. 한 십 수년이 되든지 전에 근 십 년이 돼 가는데 한강 모래사장에서 뭐 예수 믿을려고 애를 쓸 것이 아니라 열흘 동안만 여기 집회 와서 참석하고 '성령 받으면 다 된다' 그렇게 말하는 집회에 많이 모였던 사람들이 어떻게 됐는지 모르지마는 그 집회를 주최했던 사람은 완전히 탈선되어서 계룡산에 가서 자기가 날짜 잡아놓은 것이 다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또 몇 십일 단식기도에서 신앙이 그만 장성해지고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성화가 되어진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다 끝을 맺고 이제는 하던 큰 소리도 다 없어지고 잠잠해졌습니다.
신앙은 어떤 사람이든지 자기에게 주시는 그 현실 현실을 믿음으로 걸어가므로 차차 구비해지고 성장되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다섯 가지씩 다섯 가지씩 세 단계가 있는 것을 말씀한 적이 있습니다.
다섯 가지씩 세 가지니까 삼 오 십 오 열다섯 층층대가 된다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순서를 밟아서 자라가야 되지 그렇지 않고 기도로 또 어떤 사람은 성경을 파고들어 앉아있는 문서 연구로 이렇게 자기구원을 급속히 이루어 갈려고 하는 분들은 대개 실패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도 혹 있지마는 실패하는 사람들이 성공하는 사람보다 많습니다.
여 9장을 집에 가서 살펴보면 잘 알 것입니다. 첫째로 다섯 단계가 있는데 대개는 여기에 인함입니다. 유다서에 보면 가만히 들어온 자 몇이 있다 이렇게 말했는데 택자든지 불택자든지 이 순서를 밟지 않고 들어온 사람들은 결국은 자기의 한 생활이 다 허사가 되는 것은 일반입니다. 택한 사람들의 생활도 허사가 되고 불택자의 생활도 허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라면서 이 소경은 자기가 모든 면이 불행하지마는 불행한 중에도 가장 불행한 그 원인은 소경입니다.
소경으로 인해서 전체가 불행하게 된 불행 중에 불행하게 된 것이 소경인데 예수님을 만나 가지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유익을 보는 것보다도 오히려 진흙을 발라 가지고 눈이 뚱뚱하게 진흙 칠갑을 하니까 가장 불행 중에 불행스러운 그것이 더 불행해졌다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소경은 원망이나 불평이나 낙망하지를 아니했습니다. 우리가 보는 예수님을 믿으면서 다 자기에게 불행이라고 생각되는 그런 점을 해결을 짓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으려 나오는 사람들이 많고 또 자기가 소원하는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으려 나오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마는, 그 중에는 그것이 당장에 해결되는 그런 순서로 이루어지는 것도 간혹 있기는 있지마는 그것도 그 뒤에 이 사람이 닥친 이런 순서와 같은 순서를 만나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소경처럼 자기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불행스러운 것을 면해 볼려고 예수님을 믿었는데 예수님을 믿어 주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니까 불행이 없어져야 될 터인데 불행이 더 불행스러워지고 예수님 믿기 전보다도 예수님 믿은 후에 훨씬 못하게 되는 이런 경우가 보편입니다. 얼추 되어지는 것이 이렇게 되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들이 신앙생활 하는 신앙경력을 돌아보면 이렇게 되어지는 분이 대부분입니다. 그것은 그렇게 될 수 있는 이유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가 아무나따나 도적같이, 시랭이 같이, 창기 같이 모든 불법을 자기의 생활방편을 삼아 그렇게 살든 사람이 예수 믿고 난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라고 하니까 자연히 장사하는 사람이나 관직생활 하는 사람이나 어떤 그 각지 각처에서 사는 그 생활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해서 모든 것이 마찰이 많고 형통치 아니하고 외로워지고 쓸쓸해지고 또 장애가 많고 이렇게 되어지는 것이 이것이 보편이요 이것이 하나의 필연성이라고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이 소경에게 하필 불행스러운 그 점에 진흙 발라놓고 예수님 때문에 이전보다 더 못하게 되었는데 거기다가 당장 씻어주시든지 눈을 낫게 하는지 이렇게 해주시지 안하고 또 가서 먼 실로암 못에 가서 씻어라 이렇게 시킵니다.
예수님 때문에 불행스러워진 예수 믿는 사람에게 불행스러운 그 자리에서 또 하나님의 말씀은 더 괴롭히는 순종을 하라고 그렇게 하시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 내부는 다 필연성입니다. 내부는 필연성이지마는 외부적으로는 이런 순서로 짐작하고 깊이 생각하면 깨달음이 나올 것입니다. 그럴 때에 불평하고 순종하지 안 하는 사람은 예수 믿어서 재미있는 꼴을 보지 못합니다.
우연히 나면서 보지 못하는 것도 마음에 기가 막히고 분해서 못 견디는데 공연히 눈에다가 진흙 발라 놓고 또 '가서 또 눈 씻어라' 그런 소리 듣지 않겠다고 하기 쉬운 것이 신자들인데 이 소경은 아무 말하지 안하고 '예'하고 와서 씻었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실 때에도 순종을 인해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는 그 인도로 인해서 처음에는 다 불행을 만났던 것입니다. 모두 쓴물을 만났다 물이 없었다 바다를 만났다 먹을 것이 없다 이렇게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인도를 따라가다가 다 불행들을 만났습니다. 그것이 첫 순서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그 명령대로 순종했습니다. 하나님 따라 순종하다가 이 꼴 됐는데 또 무슨 순종이야 하고 패역을 부리지 아니하고 시키는 대로 순종을 했을 때에 쓴물이 단물이 되었고 또 반석에서 물이 나왔고 또 홍해가 육지 같이 되어져서 건너게도 되어졌던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인도에서 다 이렇게 되어지는 것이 이것이 일반적 원리입니다.
간단하게 이렇게 예수님으로 인해서 더 불행해졌소. 그런데다가 하나님께서 또 더 불행해진 그것을 또 더 순종하랍니다. 가만히 대고 있으니까 칠해놓고서 또 '가서 씻어라' 또 이렇게 순종하라합니다. 그래도 원망하지 안하고 가서 씻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걸어가는 신앙 걸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영원한 구속으로 구속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인하여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당신의 요구대로 여생을 다 그대로 살아 드리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으로 인해서 자기는 경제적이나 신체적이나 활동적이나 가정적이나 어떤 그 불행이 부딪쳐졌다 할지라도 주님이 날 구원하시기 위해서 당하신 고난에다가 비하면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달게 참고 견디는 것이 일차적으로 신앙이라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으로 인해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해서 자기에게 어떤 불행이 왔다 할지라도 예수님이 날 구속해 주신 것을 생각하고 단 마음으로 기쁘게 참고 견디는 것이 이것이 신앙이라 하는 것을 여게 보입니다.
또 참고 견딜 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뜻도 없고 아무것도 모르는 이 일 곧 또 '가서 씻어라' 바를 때는 언제며 '씻어라' 할 때는 또 언제인지. 또 씻어라, 사람이 보면 원망 불평할려고 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마는 또 가서 씻어라 이래하니까 예하고 가서 씻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어떻게 어려워진 그 지경에서라도 어떻게 자기가 곤고해지고 불행스러워지고 아주 어려워지고 가난해지고 비참해졌다 할지라도 그것을 예수님이 대속해 주신 은총을 생각하고 지당한 줄 알고 주를 생각하면서 단 마음으로 참고 견디는 것이 신앙이요.
원망 불평 낙망하지 아니하고, 거게서 주의 구속을 생각하면서 기쁨으로 참고 견디는 것이 신앙이요 또 여게서 하나님이 말씀해 주시면 순종하라하면 또 무엇을 어떤 그 형편을 당했던지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을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거게서 순종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면 어떤 불행에서도 단 마음으로 감사하면서 참고 견디는 것이 신앙이요 또 그 불행 중에 또 순종하라 할 때에 예하고 단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이 이것이 신앙입니다.
우리 할 일이 이 두 가지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두 가지를 했을 때에 주님께서 이렇게 믿는 자에게 예수님으로 인해서 어느 지경까지 이르러도 원망 불평 낙망 없이 주의 구속을 생각하고 이보다 더 이러다가 죽어도 살아도 주를 위해서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는 것이 마땅한 줄 알고 어느 지경까지 이르렀을지라도 낙망하지 안하고 원망 불평하지 안하고 감사함으로 참고 견디는 이것이 우리의 신앙이요
또 거게서 견디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또 참 설상가상으로 거게서 더 불행스러운 '순종을 해라' 해도 예 하면서 단 마음으로 순종하므로 죽어도 순종하는 그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어느 지경까지 이르러도 원망 낙망 불평 없이 기쁨으로 참고 견뎌야 하고, 또 여기에서 어떤 불행의 어려움의 명령이라도 단 마음으로 순종해야 됩니다. 요것이 신앙이요 요 두 가지가 신앙입니다. 요걸 해야 됩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끝에 하나님이 세 가지 하신 일이 있습니다.
하나는 무엇입니까 이제는 자기의 불행 중에 불행이라는 그 문제인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것이 해결이 되었습니다. 아, 눈을 뜨고 보니까 주님이 진흙 발라서 눈에 뚱뚱하게 바른 그것을 참고 견디는 그것 무슨 큰 일입니까? 눈에 진흙을 한번 바르는 것이 아니라 천 번을 발라도 천 번 바르고 천 번 씻어도 눈이 떴으면 그만하면 오히려 적은 수고로 큰 것을 얻지 안 했습니까? 우리 믿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 다 이런 것입니다.
눈이 낫고 보니까 눈이 낫기 전에는 원망 불평하기 쉬웠지마는 낫고 나서 돌아보니까 우리가 생각해 볼 때에 하 나면서 눈먼 소경이 없었는데 그 뭐 진흙을 눈에 바른 것이 불평할 것이 뭐 있으며 그 뭐 어려운 것이며 그때 참고 견딘 것이 뭐 큰 일이며 가서 씻은 것이 뭐 큰 일이겠습니까? 주님의 인도를 따라 가는 일이 다 가치를 말한다면 이렇다는 것입니다.
눈이 뜨고 보니까 그 사람에게 모든 불행은 다 물러갔습니다. 모든 불행은 다 해소가 되어버렸습니다. 봄이 되면 얼음이 녹아지듯이 그 사람에게 있는 모든 불행은 다 해소가 되어버렸소. 그라고 나니까 예수님 만나기 전보다 훨끈 행복스러워 졌습니다. 이것을 첫째로 우리에게 보이고 있습니다.
어느 지경 예수님으로 인해서 예수님 때문에 눈이 더 어두워졌다 말이요. 더, 더 어두워지고 더 불편해졌다 그거요. 어느 지경까지 예수님으로 인하여 불행스러워 졌을지라도 예수님의 구속을 생각하고 단 마음으로 참고 견딜 것과 또 거기에서 어떻게 불행스러운 그런 명령일지라도 끝까지 죽는데 까지 순종할 것 요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그라고 나면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뭐이냐? 우리의 금생 내세에 모든 불행을 다 해소시킵니다.
믿기 전보다 훨씬 좋아집니다. 왜 불행의 원인이 완전히 행복으로 바꾸어졌습니다.
어두운 눈이 밝은 눈으로 바꾸어졌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신자가 두 가지를 단 마음으로 이루어 가졌을 때에 하나님께서 세 가지를 해주십니다. 모든 불행스러운 모든 그것을 하나님의 권능으로 변화시켜서 아주 좋게 했습니다. 어두운 눈이 밝은 눈으로 밝은 눈이 되게 해 주었습니다. 이거하나 했고 이라니까 그에게 모든 천대 멸시 가련 거짓 이런 모든 더러운 것이 벗어져버렸습니다. 믿기 전보다 확실히 좋아졌소. 하나님께서 이 세 가지 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첫 단계입니다.
단번에 이것이 다는 안 되도 질은 이 다섯 가지 순서가 다 이루어지고 차차차차 실은 이런 질이 양적으로는 일년이태 믿어가면서 점점 이 양은 충만해져야 합니다.
그러기에 이 다섯 가지 단계라는 요것을 우리가 기억하고 실천해야 됩니다.
이러니까 다음으로 다섯 가지는 어떤 것인가 이 다섯 가지 이 순서를 밟은 그 사람은 누가 뭐라고 말해도 그만 그 사람은 예수님에게 속한 사람이 돼버렸습니다.
예수님에게 소속이 되었소 그때에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제사장들 하나님 섬기는 백성들이 많았지마는 예수님의 편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편은 없었소. 이 사람은 예수님의 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소속이 돼버렸습니다. 예수님에게 속한 예수님의 편이 되었습니다.
이 다섯 단계를 통과함으로 그 사람은 그만 주님에게 속했고 누가 뭐라고 해고 주님 떠나지 안하고 주님 편이 돼버렸소. 주님이 미워하면 섭섭해하고 주님이 좋아하면 자기도 다른 사람이 주님이 좋아하면 좋아하고 주님을 해치면 대항하고 주님을 위하면 자기도 환영을 하고 뭐 이런 사람이 돼버렸소 소속이 옮겨집니다.
이 다섯 가지 단계를 경험하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제가 아무리 떠들어 쌓아도 하나님 편은 안됩니다. 자기가 자기편이 되든지 어떤 인간 편이 되든지 되지 하나님의 편은 안됩니다. 분명히 하나님과 진리 이 두 편이 있고 다른 편이 있어 하나님 편은 안됩니다. 진리편이 안돼요 저는 제 편 되고 어떤 인간 편 되지 안됩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됩니까 시청각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거기 바리새 교인들 서기관들 제사장들 그들이 듣고 보고 느끼는 것과 이 다섯 가지 순서를 겪은 하나님에게 속한 이 소경 되었다가 눈뜬 이 사람의 시청각이 완전히 다릅니다.
그 때 있던 많은 유대인 열심쟁이 바리새 교인들 또 성경학자 서기관들 또 제사장들 이 전체와 이 소경으로 나았던 이 사람과는 견해가 대립입니다. 보는 것이 달랐고 듣는 것이 달랐고 느끼는 것이 달랐고 깨닫는 것이 달라졌습니다.
시청각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게 없으면 안됩니다. 이게 없으면 안돼요.
아무리 한자리 있고 어디까지 세계에 유명해져도 시청각이 주님과 단일 된 이것이 있고 주님과 대립인 언제든지 마귀 입장에 서 가지고서 시청각이 마귀적이고 세상적이고 인간적이고 다 자아적인 이것으로서 갈라집니다. 그러기에 보는 눈을 가진 사람은 하나만 봐도 압니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거요.
그러기에 이 두 가지 할 일을 해야 하나님이 해주시는 이 세 가지를 받을 수 있고 이 세 가지를 받아야 자기는 주님에게 소속하게 됩니다. 주님을 사랑하게 되고 주님에게 속하게 되고 주님 편이 됩니다. 이 소속이 무섭소 소속에 따라서 그이의 모든 발동은 시발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는 것 듣는 것 깨달아짐이 달라지니까 자기 아버지는 뻘뻘 떨면서 제가 장성하였으니 물어 보십시오. 뻘뻘 떨고 출교 당할까 뻘뻘 떠는데 이 사람은 담력을 얻었습니다. 담력을 얻었소. 바로 보니까 불에 들어가면 타 죽는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불에 못 들어가도록 하는 소리야 듣기 좋지 뭐 불에 못 들어가도록 한다고 벌벌 떨게 뭐 있겠소
이와 마찬가지로 바로 깨닫고 보니까 아 주님으로 인해서 고난받는 것은 가난해지는 것은 그 분 위해서 잠깐 나그네 세상에서 그 분을 위한 고난은 받으라는 이것이 얼마나 영광이요 존귀요 유익인데 겁낼 것이 뭐 있겠소? 전체가 자기 좋게 하는 것인데 아, 주님 때문에 욕 얻어먹는 것도 좋지 주님 때문에 매맞는 것도 좋지 주님 때문에 갇히는 것도 좋지 주님 때문에 죽는 것은 더 좋지 깨닫고 보니까 세상이 두려워하는 모든 두려움이 두렵지 안하고 다 담대해졌습니다.
그때에 이렇게 독립적으로 담대히 주님 편에서 나가는 담력을 가진 사람은 그 무리 가운데는 이 한 사람뿐입니다. 예수님 따르는 제자들 외에는 이 한 사람뿐입니다.
담력을 얻었습니다. 주님에게 속하게 되고 시청각이 다 되면 담력을 얻고,
그라면 어찌됩니까 핍박받습니다. 이제는 핍박받소 이제는 핍박받습니다. 핍박을 받는다고 그 사람이 핍박한다고 도망을 쳤습니까 아니요 핍박을 해도 그 자리에서 증거를 하니까 나가라 쫓아내니까 나갔소 빌립보 옥중에서 매를 그렇게 때리고 난 다음에 옥문이 열렸으니까 그 사람들이 피해서 도망갔습니까? 바울이 도망가지 안 했소 도망가지 안 했소. 왜? 바른 것이 삐뚤어진 가운데서 있었다면 끝까지 삐뚤어진 것을 깨뜨리고 하나님을 힘입어 할 일이지 뭐 때문에 도망을 치겠소? 소경은 나가지 안 했습니다. 자꾸 증거하요
이라니까 저거가 말하기를 이놈이 요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온 놈이 우리를 가르칠려고 한다 이놈 가라. 문밖에 밀어내어 쫓아내어 버렸어. 그래 나왔습니다.
거기서 쫓겨 나왔어. 쫓겨나오니까 예수님께서 찾아 오셔 가지고 예 네가 인자를 믿느냐? 내가, 나를 눈을 띄워 준 당신은 내가 믿지마는 인자는 내가 누군지 모르겠습니다. 그를 가르쳐 주십시오. 아, 선생님이 소개하면 내가 얼마든지 믿겠습니다. 내가 전에도 말하였거니와 지금 너와 같이 있는 너에게 말하는 사람이 곧 인자니라 예 믿겠습니다. 믿사옵나이다 했습니다.
인자를 믿는 것은 이것은 인자라는 말은 무지 무능의 연약의 아주 가난하고 인간 중에 제일 가난하고 비참한 그런 인간의 모든 불행스러운 점을 가르쳐서 인자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구약에 인자라고 한 것은 참 무지 무능의 만물 중에 불쌍하고 가련한 인생이란 그 뜻입니다. 인자를 믿느냐? 신약에 와 가지고는 예수님을 인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만이 인자라고 했소 구약에는 일반적인 불쌍한 사람을 가르쳐서 인자라 했고 신약에는 예수님을 인자라고 했습니다.
'인자를 믿느냐' '예 믿사옵나이다.' 인자를 믿었소 하나님의 무한하신 그 무한하심이 무한하신 이 부요를 택한 자에게 주어 택한자를 부요케 하기 위해서 가난해지신 모든 부요를 가난한 자를 부요케 하기 위해서 가난해진 이 가난해진 인자를 믿느냐? 모든 부요를 너 주기 위해서 내놓고 가난해 졌는데 이 부요를 너 주기 위해서 가난해진 이 사실을 믿느냐 하늘의 부요를 네가 받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예 믿사옵나이다 받았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승계입니다.
이 부요를 바울도 받았기 때문에 없는 자 같으나 모든 자를 대 주는 자요 무능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모든 사람을 살리고 부요케 하는 자라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 자기는 인자를 믿는 그걸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처음에 두 가지 신앙을 지키는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은혜로 세 가지 이루어진 경험과 체험을 얻게되고 이 경험과 체험의 가진 이 신앙이라야 모든 것보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께 속하게 됩니다. 주의 편이 됩니다.
이라고 나면 이제 시청각의 모든 것이 정확해지고 달라집니다. 달라지요 이러니까 이제는 담대한 사람이 됩니다. 뭐 굶어 죽을까 비겁 또 배척 당할까 비겁 쫓겨나서 밥통 떨어질까 비겁 이제라도 인간의 비위를 맞추어서 모든 돈 많은 사람으로 말미암아 붙들어서 이 사람들을 내성을 만들어야 되겠지 그런 비겁 같은 그런 비겁이 없습니다.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는데 인간이 안주면 무슨 상관이 있으며 하나님은 돕는데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하겠느냐? 비로소 올바른 시청각이 될 때에 성도에게는 담력이 오는 것입니다.
외로움이 배척이 모략 중상이 인간의 모든 여론이 가난이 고통이 감옥이 공산주의가 일본 사람이 죽음이 두렵지 않는 담력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라면 타락한 속화된 인본주의 외식자 들에게 박해를 당하는 것이 역사의 성도들입니다.
나면서 앉은뱅이는 하나님에게 홀빡 받고 주님으로 인해서 자기는 몸도 생명도 바치고자 하는 이런 경험체험이 있는데 이렇게 하나님을 잘 믿어 볼려고 하는 사람을 열심 있게 잘 믿는다는 바리새 교인들이 이를 박해했습니다. 이런 박해가 가치 있는 박해지, 되나 안되나 어짜든지 제가 잘못해 가지고서라도 거게 박해만 되면 외롭게만 되면 하나님으로 인해서 진리로 인해서 자기가 바른 길 걸어감으로 인해서 당하는 것이 되어져야 되지 아무나따나 제가 잘못해 가지고 당해 놓고도 거기다가 더리 붙여 가지고 십자가의 고난이라고 너무 가증스러운 것입니다.
이렇게 어려움을 당하고 난 다음에 인자를 믿게 되었습니다. 인자를 예수님으로 인한 하나님이 내어놓으신 예수님이 내어놓으신 하나님의 모든 부요를 자기 것을 만들어버렸습니다. 그 다음에 다섯 가지 있는데 그것은 내일 아침에 증거하겠습니다. 시간이 많이 갔습니다. 이제 처음에 다섯 가지 중에 우리가 할 것 두 가지 요것 하면 반드시 주님께서 세 가지 해주십니다.
요 순서를 통과했을 때에 자기는 주님에게 속하게 되고 주의 편이 되고 자기라도 주님이 책임집니다. 주님이 책임져 주님을 안다. 안다 말은 책임진다 말이요.
어디라도 주님이 핍박받으면 같이 받고 주님이 칭찬 받으면 같이 칭찬 받고 주님이 몰리면 같이 몰리고 주님이 배척 당하면 같이 배척 당해서 주와 함께 고난을 당하니 주님을 때 놓고 저 혼자 날뛰는 이런 사람이 안됩니다.
주님에게 속하게 돼요 그라고 인제 모든 듣고 보고 깨닫는 것이 주와 한가지되 정확해져 삐뚤어지지 안 해. 물질주의자가 물질 중심으로 견해하고 권세주의자가 권세 중심으로 견해하고 자기를 좋아하는 자는 자기를 중심으로 견해 하는 이 썩은 견해를 가지지 않습니다. 이런 썩은 견해를 가지지 안 해요.
시청각이 정확했어. 이러니까 저희들과 같지 아니하니 핍박하지 삣고 깎고 헐지 그래도 끝까지 증거 하다가 쫓아내니까 나왔소 그들에게 버림을 받았소 버림받으니까 인자가 찾아왔어 하나님이 모든 부요를 내어놓고 가난해지신 이분이 내어놓은 부요를 그에게 주었습니다. 이것이 기독자의 성공입니다.
이외에 취할 것이 뭐이 있소. 온 천하 것을 다 차지하면 그것이 뭐 자기 떠나면 그만인데 뭐 가치 있습니까 어리석지 맙시다. 성공 같으나 실패가 있고 실패 같으나 성공이 있습니다. 세상이 모르는 욕망을 가지고 이면을 성공해나가는 이것이 기독자입니다.
세상이 모르는 저축 모르는 욕망 모르는 담력 모르는 일이요 이것으로 사는 것이 기독자들이요 껍데기 세상살이에서 환영하면 뭐할 것이며 존대 받으면 뭐할 것이요? 천하에 있는 것 차지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유명해도 소용없소. 그분 한 분이 인정해야 됩니다. 예 그분 한 분과의 문제라 해결이요. 그분이 주재시오 그분이 만왕의 왕이십니다. 그분이 알파와 오메가요.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하입시다.
선지자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