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칼빈 (John Calvin : 1509-1564)

 

 

스위스 제네바의 개혁자인 칼빈은 1509710일 파리에서 북동쪽으로 70마일 가량 떨어진 노용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본래 노동자였으나, 부지런함과 조직력을 인정받아 노용관구의 여러가지 업무를 보다가 최종적으로 교회의 재정을 관리하는 일을 하였다. 12세 때 이미 칼빈은 그의 부친의 세심한 노력의 덕택으로 성직록을 부여받았으며, 1527년에도 또 다른 성직록을 수여받았다. 당시 이 성직록은 장학금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한편 칼빈은 카페트 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 후 1513년에 파리로 간 그는 라 마르슈 학교에 입학하여 부친의 뜻에 따라 사제로서의 길을 준비하였다. 특히 그곳에서 그는 라틴어 문법교사인 마튀렝 꼬르디에를 만나 라틴어의 기초를 닦았다. 곧이어 몽테귀 대학으로 진학한 칼빈은 성경과 스콜라주의를 비롯한 엄격한 문학 교육을 받았으며, 1528년에 문학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러나 그의 부친이 예기치 않게 노용 관구에서 곤란한 문제에 휩쓸려 어려움을 겪게 되었는데, 그 결과 자신의 아들이 사제가 아니라 법률가가 되기를 원하였다. 부친의 뜻을 따르기로 결정한 칼빈은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오를레앙으로 옮겨갔다. 오를레앙 대학교로 진학한 그는 법학자인 피에르 드 레스트왈르 교수와 루터파이자 헬라어 전문가인 멜키오르 볼마르 교수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나 그 이듬해에 그는 부르쥬 대학교로 옮겨가 그곳에서 계속 법학 공부에 전념하였다.

그 후 1531년 칼빈은 오를레앙 대학의 한 법학 교수의 학설에 관한 출판 문제로 파리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부친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결국 그해 5월에 부친이 사망하였다. 이후로 칼빈은 법률학 공부를 포기하고 실질적으로 좋아하였던 고전 문학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파리로 되돌아온 칼빈은 1532년에 처녀작인 [세네카의 관용론에 관한 주석]을 출판하였는데, 곧 학계에 그의 명성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이전의 결심과는 달리 오를레앙에서 법학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한편 칼빈은 하나님의 은혜에 완전히 압도당하는 갑작스러운 회심을 체험하였는데, 이후로 종교 개혁자가 되었다. 그러나 칼빈은 이러한 회심에 대해서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회심의 시기를 밝히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1527년부터 1534년 사이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그후 파리로 돌아온 칼빈은 한 사건에 연루되어 피신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 사건은 1533년에 파리 대학교의 총장이자 칼빈의 친구인 니콜라스콥이 총장 취임연설에서 공식적으로 마르틴 루터의 이신칭의 교리를 지지한 사건이었다. 그 일로 콥은 피신해야 하였으며, 이 사건에 관련된 칼빈도 같은 운명이었다. 결국 칼빈은 1535년에 스위스의 바젤로 도피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인문주의자인 데지데리우스 에라스무스에게서 성경을 연구하는 방법을 비롯한 많은 것을 배웠다. 아울러 1536년에는 그의 대작인 [기독교 강요]의 초판을 라틴어로 출판하였는데, 그 책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게 되었다. 원래 그 책은 프랑스인들을 위한 신학 입문서로 계획된 것이었다. 그후에 프랑스 개신교에 박해가 일어나자, 칼빈은 프랑스 개신교의 입장을 변호하기 위한 목적을 그 작품에 추가시켰다.

초판의 기독교 강요는 전체 6장으로 구성된 소책자였다. 그러나 그 책은 1559년 최종판이 나올 때까지 계속 증보되었으며, 총 라틴어판 8판과 부러판 5판으로 출간되었다. 특히 최종판은 사도신경의 순서를 따라 4권으로 구성되었다. 1권은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지식에 대해서, 2권은 구세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관해서, 3권은 그리스도의 은혜의 축복과 효과들을 얻는 방법에 대해서, 그리고 4권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초대하는 외적인 수단들에 대해서 다루었다.

같은 해에 칼빈은 집필 활동과 더불어 휴식을 취할 목적으로 스트라스부르로 가서 정착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라나 노용에서 스트라스부르로 직통하던 길이 프란시스 1세과 독일황제 카알5세의 전쟁으로 통행이 차단되었기 때문에 우회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때 칼빈은 잠시 제네바를 경유하게 되었다.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의 물꼬를 튼 기욤 파렐이 이소식을 전해 듣고 칼빈을 찾아와 제네바 시의 종교개혁을 완성하는 것을 돕도록 간청하였다. 처음에 칼빈은 자신이 그 일에 부적합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연구를 위한 자신만의 계획이 있음을 밝히면서 파렐의 요청을 정중하게 거절하였다. 그러자 파렐은 저주에 가까운 말로 칼빈을 위협하였는데, 결국 칼빈은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파렐의 간청을 수락하였다.

한편 제네바에 칼빈은 성 베드로 성당에서 바울 서신을 강해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제네바는 텃세가 강한 도시였기 때문에 칼빈은 처음에 "저 프랑스인"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그가 153610월에 로잔에서 벌어진 성찬에 대한 논쟁 이후로 사정은 달라졌다. 당시 그는 그 논쟁에 참석하여 로마 카톨릭의 오류를 교부 신학을 인용하면서 하나 하나 반박하였는데, 결과적으로 그 논쟁은 개혁자들의 승리로 돌아갔다. 그로 인하여 그 이듬해에 칼빈은 비로소 정식으로 설교할 수 있게 되었다.

그후 칼빈은 제네바의 개혁에 박차를 가하기 위하여 파렐과 함께 [개혁문건]을 작성하여 시 의회에 제출하였다. 그 문건에는 성찬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매주 시행한다고 되어 있었다. 그리고 성만찬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서 감시인을 두어 사람들의 생활을 감독하게 하며 수찬 정지를 명할 권한이 교회에 있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또한 시편 찬송의 사용과 교리 문답의 교육의 필요성까지 언급하고 있었다. 아울러 칼빈은 [개혁문건] 외에 어린이의 교육을 위한 교리 문답인 [제네바 교회에서 사용되는 교육과 신앙고백]을 작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21개 조항의 신앙 고백서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개혁문건]은 시 의회에 의해서 검토 과정을 거치면서 몇 가지 사항에서 수정되었다. 우선 시 의회는 성찬 조항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였다. 시 의회는 끝까지 성찬을 일년에 4차례만 거행할 것을 고집하였으며, 칼빈은 어쩔 수 없이 양보하였다. 또한 장로에 대한 임명권이 시 당국자들에게 주어졌다. 그 외에도 시 의회는 치리의 권한에 대하여 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칼빈과 파렐에 의해서 제시된 문서들이 시 의회를 통과하자, 곧 그들은 제네바 시민들에게 이 신앙 고백서에 서명 동의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강한 반발이 일어났다. 그러자 칼빈과 파렐은 신앙 고백을 하지 않는자에게 성찬을 베풀기를 거부하였다. 반면에 시 의회는 누구에게나 성찬을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심지어 시 의회는 여러 가지 사정을 감안하여 칼빈의 예배 의식을 포기하고 베른의 예배의식을 따르기로 결정하고 말았다. 이로써 시당국자들은 세속 정부가 교회 생활을 지배할 권리가 있음을 천명하였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조치에 불만을 품은 칼빈과 파렐은 1538년 부활절에 설교는 하였으나, 당연히 거행되어야 할 성찬을 시행하지 않았다. 성찬의 거룩성을 해친다는 생각 때문에 그렇게 하였던 것이다. 결국 제네바 의회는 두 사람을 추방하기로 결정하였다.

추방된 칼빈과 파렐은 파리로 갔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파렐은 뇌샤텔로 초빙되어 갔다. 반면에 칼빈은 그대로 머물면서 저술활동에 전념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마르틴 부처를 비롯한 스트라스부르의 개혁자들의 끈질긴 초빙과 위협에 못이겨 결국 칼빈은 스트라스부르행을 결정하였다. 그곳에 도착한 칼빈은 곧 성 니콜라스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있던 프랑스 피난민 회중의 목사로 일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성경을 강해하는 일에 전념하였을 뿐만 아니라 예배에 새로운 것을 많이 도입하였다. 예배 시에 프랑스어로 된 시편 찬양을 도입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일정한 형식이 없이 진행되던 재침례파의 예배를 반대하면서 새로운 예배의 절차를 만들었으며, 로마 카톨릭의 고해 성사 대신에 목사와의 개별적인 면담을 시행하였다.

이러한 것들을 시행함에 있어서 칼빈은 부처에게 많은 빛을 졌다. 상당 부분이 부처에게서 배운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칼빈이 훗날 제네바에서 실시하게 될 4중직과 예배절차 그리고 교리 문답의 구조 등이 그러하였다. 이미 조직 신학 분야에서 탁월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던 칼빈은 당시 부족하였던 실천신학 분야의 지식을 부처를 통해서 보충받았던 것이다.

아울러 칼빈은 목회자로서의 활동 이외에 장 스튀름이 교장으로 있던 대학의 교수로 임명되어 신약 성경을 가르쳤다. 교수로 활동하는 중에도 틈나는 대로 저술활동에 전념하였는데, 이 때 그의 주요 저서들이 많이 출간되었다. 우선 그는 1539년에 [기독교 강요]의 수정 증보판을 발행하였으며, 1541년에는 불아판을 내놓았다. 그리고 1539년에는 최초의 주석서인 [로마서 주석]을 발표하였으며, 더불어 같은 해에 제네바인들에게 로마 카톨릭으로 되돌아 올 것을 권유하였던 추기경 사도레토를 반박하는 글인 [사돌레토에 대한 답변]이라는 서신을 작성하였다. 또한 같은 해에 칼빈의 주도 하에 찬송집인 [노래로 된 시편들과 성시들]이 출간되었다.

그 후 칼빈은 스트라스부르에서의 체류 기간 중 후반기를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간의 논쟁에 참여하는 일로 보내었다. 그러한 논쟁들은 프랑크푸르트, 하게나우, 보름스 그리고 레겐스부르크 등지에서 개최되었는데, 이 때마다 칼빈은 대표자의 자격으로 참석하여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당시 그는 논쟁에서 만난 필립 멜랑히톤과 친밀한 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나아가 칼빈은 1541년에 성만찬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 작품인 [주의 만찬에 대한 소고]를 발표하였다. 이 저서에서 그는 루터파와 쯔빙글리파의 양극단을 피하면서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즉 그는 그리스도의 편재성을 근거로 실제적인 임재를 역설한 루터에 반대하여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심을 주장한 점에서 쯔빙글리를 지지하였다. 반면에, 성찬을 단지 상징으로서만 이해한 쯔빙글리를 반박하고 그리스도가 성찬에 임재하신다고 주장한 점에서 루터에 동의하였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칼빈은 성찬을 받을 때에 신자들이 성령의 역사하심에 따라 신앙으로 받게 되는데, 그 신앙을 통하여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참 실체에 참여하게 된다고 역설하였던 것이다.

한편 1540년 말에 제네바에서 파렐을 지지하는 기욤파가 권력을 잡게 되자, 그들은 칼빈을 그들의 도시로 다시 데려오고자 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스트라스부르에서 맛본 행복과 평안을 포기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 그들의 제의를 거절하였다. 이때 파렐이 나서서 이전과 비슷한 말로 칼빈을 설득하였다. 곧 두려움에 사로잡힌 칼빈은 제네바로 되돌아 가기로 결정하였다. 1541년에 제네바에 도착한 칼빈은 이전에 중단되었던 곳에서부터 성경을 강해하기 시작하였다. 아울러 그는 [교회법령]을 작성하였는데, 시의회의 재가를 얻어 곧 시행에 들어갔다. 그 법령은 부처의 영향을 받아 작성된 것으로 목사, 교사 장로 그리고 집사의 4가지 직분을 설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어린이에 대한 종교 교육의 근거를 제시하였다. 그 이듬해에는 1537년에 작성된 것과는 달리, 부처가 작성한 교리 문답의 구조에 따라 [교리문답]을 새로 작성하였다. 또한 그는 [교회의 기도와 찬송의 형식]이라는 예배 모범을 만들었다.

이러한 일련의 개혁과 더불어 칼빈은 목사단과 12명의 장로들로 구성된 감독법원을 조직하였다. 감독법원은 신자들을 감독하고 훈계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으로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에게 수찬정지나 출교를 가할 수 있는 치리의 권한을 부여하였다. 사실 칼빈은 주의 성찬을 중요한 것으로 여겼다. 그것은 "주님의 성찬을 부끄럽게 더럽히느니 차라리 죽기를 결정하겠다."는 칼빈의 고백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한 성찬의 거룩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치리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치리는 단순히 억압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신자들로 하여금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행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 당국자들은 치리의 권한이 자신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간주하고 이러한 조치를 극구 반대하였다. 이미 시 정부는 장로를 임명하는 권한을 자신들의 권한으로 확보해 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치리의 권한까지도 자신들이 독식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심지어 몇몇 시민들마저 그러한 조치를 종교적인 규율로써 자신들을 억압하는 것으로 이해하고서 비판하고 나섰다. 이 문제에 얽힌 갈등과 논쟁은 칼빈이 사망한 1564년 까지 지속되었다. 사실 칼빈이 신자들에 대한 치리권을 교회의 권한으로 규정한 것은 교회의 권력과 정부의 권력이 철저하게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강한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한 확식에 따라 칼빈은 정부가 교회의 권한에 간섭하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하였던 것이다.

한편 칼빈은 성경의 진리를 보호하고 수호하기 위하여 여러 사람들과 논쟁을 벌였다. 먼저 1534년에 그는 애가서의 영감성을 거부하고 자신의 사도신경의 해석을 비판한 세바스티앙 카스텔리용과 심각한 논쟁을 벌였는데, 결국 카스텔리용은 추방당하였다. 그후 1551년에 파리 출신의 의사였던 제롬 볼섹이 칼빈의 예정론을 반대하자, 곧 칼빈은 반격에 나섰다. 그 사건은 재판으로 이어졌으나, 쉽게 결판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칼빈이 일련의 강의를 준비하여 볼섹의 견해를 철저하게 반박하였는데, 이 후로 볼섹은 추방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다음으로 중요한 논쟁은 1553년에 스페인 출신의 의사였던 미카엘 세르베투스와의 논쟁이었다. 그는 그릇된 삼위일체의 교리를 유포하였기 때문에 칼빈의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그는 제네바 시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되어 화형을 당하였다.

비록 많은 힘을 소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련의 논쟁에서 승리한 칼빈은 제네바에 새로운 대학을 설립할 계획을 추진하였다. 때마침 베른 정부와 로잔 아카데미 사이에서 분쟁이 일어나 테오도르 베자를 비롯한 로잔 아카데미의 여러 교수들이 해임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들은 곧 제네바로 이주하였는데, 이것은 칼빈에게 자신의 계획을 성사시킬 수 있는 하나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결국 그들의 도움으로 1559년에 제네바 아카데미가 설립되었으며, 베자는 그 아카데미의 초대 학장에 임명되었다. 명실공히 이후로 베자는 칼빈의 후계자로서 자신의 입지를 굳혀갔다. 이후 칼빈은 베자와 함께 제네바 아카데미에서 신학 교육을 담당하면서 틈나는 대로 다양한 사람들과 서신 교환을 하였다. 그러나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이라는 별명이 말해주듯이, 평소 병약하였던 그는 1558년부터 더욱 악화된 건강 때문에 고통과 어려움을 겪다가 1564527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은 중세의 성자 숭배의 가능성 때문에 공동 묘지에 안장되었으며, 그의 유언에 따라 묘비가 세워지지 않았다.

  선지자선교회

자료: 개혁주의 인명사전(정성구편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