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동행

 

1984. 11. 23. 밤

 

본문 : 창세기 5장 21절∼24절  에녹은 육십 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 육십 오 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산 채로 승천한 사람은 에녹과 엘리야 두 사람뿐입니다. 이 두 사람은 믿는  사람들이 죽지 안하고 하늘나라 가는 것을 보이는 그런 계시가 아닙니다.

 에녹은 이렇게 죽지 않고 승천한 그 기록의 앞 뒤에 여러 사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은 다 출생 후 먹고 자라다가 결혼해  가지고 자녀를 낳으면서 몇 해 동안 살고 또 그 후 단산한지 후 얼마 동안을  살다가 다 죽었다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에녹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자라다가 결혼해 가지고 육십 오 세 되는  때에 초산을 하고 그 후는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라다가  삼백 육십 오 세 되는 해에 계속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을 하다가 그러면 한 삼백  넌 동행한 셈입니다. 동행하다가 하나님이 데려 가심으로 그대로 산 채로  하늘나라를 갔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사람이 나서 먹고 입고 자라는 것도 좋고. 또 그러면서 자녀를  낳아 기르는 그것도 좋고, 또 자녀를 낳은 다음에 자녀를 통솔해서 누리면서  사는 것도 다 좋지마는 그 끝이 다 사망이라 하는 것을 여기에서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공부를 할 때에 첫째는 법을 공부하고 그 다음에는 역사를 공부하라  그렇게 아는 사람들이 지도하는 것은 거기에 깊은 뜻이 있어서 그러합니다. 법을  공부하라는 것은 인간으로서 자기를 초월하는 전체의 공평을 아는 자가 됨으로  자기 의무를 행하고 침략하고 가해하는 자가 퇴지 않기 위해서 법을 공부하라  그렇게 말하는 것이고, 또 사학을 공부하라는 것은 사람들은 불귀 칠팔 십 년에  지나지 못하는 짧은 기간을 살고 끝나기 때문에고 짧은 토막만 보고 긴 세월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몇백 년 또 혹 몇천 년까지의  그역사를 우리가 책장 몇 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보면 아주 존귀한  사람이 천해지고 천한 사람이 존귀해지고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던 것이 다  멸시 천대하는 것으로 바꾸어지고 한 때 천대를 받던 것이 지극히 존귀함을 받는  인간의 그 굴곡이 심한 장원한 그 통계를 봄으로 사람이 한 시대한 토막 현실에  파묻히는 사람이 되지 아니하고 장구한 통계를 봄으로 좀 더 시야가 넓은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 사학을 공부하라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그것을 많이 주장했기 때문에 제 밑에 있는 교인으로서 법을 공부한  사람들은 대개 목회할 마음을 가진 사람이 아닌가 그렇게 제가 생각합니다. 법을  공부하는 사람을 내가 만나 가지고 묻습니다. '왜 법을 공부하게 됐느냐?' '법을  공부하는 것이 좋다고 가르침을 받아서 그래서 법을 공부했습니다.' 그렇게 말을  합디다.

 우리는 조그만한 그 시간에 파묻혀서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기독자는  시간을 초월한 것이 기독자입니다. 백 년만 보는 백 년 속에 파묻혀 사는 사람도  아니요 천 년 속에 파묻혀 사는 사람도 아니요 만 년 속에 파묻혀 사는 사람도  아니요 기독자는 시간적으로 영원을 내다보고 영원을 다 총 계산하면서 사는  사람이 기독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원을 보는 그 원시하지 멀리보지 못하는 땅에 속한사람들은  아무리 그 사람이 뭐라고 해도 너무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많이 받고 있기  때문에 그 하는 일들이 실수가 많고 영원에 비추어 볼 때는 전체가 실수요  실패요 다 과오를 범하는 것뿐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기독자라면  주님의 공로로 인해서 우리는 시간적으로 영원을 내다보게 되었고 공간적으로 이  우주만 아니라 우주 위에 있는 영계까지 다 봐서 무한이라고 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을 보고 있고 모든 피조물 위에 자존하신 창조주까지를 보면서 계산을 대서  살고 있는 것이 기독자들입니다.

 그러기에 기독자들은 모든 사람이 웃는 것을 보고 그 웃는 것이 슬픔과 같이  있다는 것을 봅니다. 모든 사람이 귀동자가, 몇 대 독신에게 귀동자가 났다고  기뻐하는 거기에 그 귀동자가 죽어서 시체가 되는 것을 같이 봅니다. 젊어서  꽃과 같은 아름다운 미남과 미인을 보면서 늙어 쪼그라진 그 허무한 노패된  얼굴보다 송장과 함께 보고 흙과 함께 보기 때문에 인생의 그 허무감을  정상적으로 깨닫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이라는 이 유혹을 거의 다 믿는 사람이면  벗어나 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여기에서 아무리 먹고 입고 재미있게 잘 산다 할지라도 아주  부귀다산으로 다자손을 가졌다 할지라도 우리는 마지막 죽는다 하는 이것을  우리는 언제든지 생각해야만 할 것입니다.

 홍포입은 부자는 그는 너무도 시야가 좁았고 근시자였습니다. 이라다가 그가  죽음 너머 있는 그 세계에 갔을 때에 그는 돌변적으로 모든 비판과 평가가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저희들 형제에게 그런 어려운 가운데에서도그 곳에 오지  않도록 해 주기를 부탁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좀 눈을 널리 떠고 시야를 넓혀야 하겠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만치 우리 보는 그 면이 넓어야 되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사람들은 대국적으로 살아야 된다, 대국적으로 모든 것을  사색해야 된다.' 하지마는 우리는 대국적이라 하는 것을 아주 멸시합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전체를 다뤄야 됩니다. 전체적으로 우리는 비판하고 평가하고  비교하고 그 전체에 맞추어 가지고 그저 되는 대로 제 실력 있는 대로는 전체에  맞추는 그 결산을 가지고 소원도 하고 경영도 하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무리 우리가 따뜻한 재미있는 가정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것이  조만간에 무엇으로 화해질란지 하는 그것을 우리가 역사를 보고 하나님 말씀을  비추어 볼 때에 참 마음 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창세기 5장에서 인간이 살고 자란다는 것과 인간이 살고  자란다는 것과 시집 가고 장가 가고 자녀 낳고 죽는다는 이것을 언제나 한 눈에  보고 이 지식을 가진 그 위에서 우리는 수입되는 것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  모든 것을 거친 너머 있는 그 유익이 우리 유익이요 그것이 실존이요 그것이  가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베드로후서 3장에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  봐야.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 날에다가 소망을 두라. 그 날에 있는 것이 있는  것이고 그날에 귀한 것이 귀한 것이고 그날에 가련한 것이 가련한 것이다. 그  날을 두고 모든 것을 비판하고 평가하라. 네 바라보는 것도 그 날에 있고 네가  오늘에 모든 언행 심사에 생활하는 것도 그날을 맞추어서 살아라.' 그렇게 성경  말씀에 우리에게 주의를 주셨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아무리 어린 자너나 자기라도 볼 때에 반드시 이것도 인생들이  걸어가고 있는 시집 가고 장가 가는 그 걸음이 그 순서가 있다. 얼마 후에  될란지, 시집가고 장가 가는 그 걸음이 있고 그 뒤에는 자녀 낳고 그 뒤에는  죽어 멸망한다는 그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 귀하지마는 우리가 그래도 인생이 죽는다는 것이것을  계산해서 그 죽음을 계산해 가지고 죽어도 할 만한 일을 해야 되겠고. 죽기  때문에 해야 될 일을 해야 되겠고. 죽기 때문에 준비할 준비를 해야 되겠고,  죽기 때문에 가치 있는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해야 되지 언제든지 살  줄로만 알고 안 죽으리라 생각하고 계산한 것은 전부 다 계산 착오입니다. 다  오산입니다.

 여기에 에녹은 삼백 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자녀 낳았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결혼 생활 할 수 있고,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자녀 양육할 수 있고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이런 사업 저런 사업, 이런 직장 저런 직장 다 할 수 있는  것인 것을 여기에 보여 줬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그는 죽음을 완전히 이겼습니다. 죽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에서만 이루어진다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죽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에서만 이루어집니다. 한 시간 동행했으면 그 한 시간에 속한 모든  요소는 다 영원히 살았고 하루를 동행했으면 하루에 속한 모든 요소는 생활의  요소는 참가한 요소는 다 영원히 살았고 일 년을 동행했으면 일 년 산 생애의  모든 것은 다 영생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 외에는 사는 길이  없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이 생명록에 다 적혀 있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생활이 다 거기에 적혀 있습니다.

 그런고로, 여기에서는 가정이나 개인이나 자기 사업이나 자기 직장이나 자기  권세나 자기 명예나 자기의 육체의 기능이나 어떤 것이든지 우리의 몸의 이  형체는 예수님의 공로로 기본구원으로 다 부활합니다. 그러나 이 심신 안에 들어  있는 기능이라는 이 기능은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합니다. 지금 살린 것은 부활 할  때에 그 산 기능을 가지고 부활하고 지금 살아나지 못한 그 기능은 둘째 죽음의  해를 받아서 그 기능은 죽고 기능 없는 그 몸으로 부활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하나님과 동행에서만 첫째 아담에게 속한 것이나 둘째  아담에게 속한 것이나 다 하나님과 동행함에서만 영생할 수 있다 하는 것을  우리는 요것을 단단히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첫째 아담에게 속한 것도 하나님과  동행하면 아무것도 썩는데 이르지 않습니다. 심지어 물질까지도 하늘에  쌓인다고서 말씀을 했습니다.

 노아는 그는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했습니다. 성경에.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데에서 온 세상을 정죄하고 하나님의 후사가 됐습니다. 온 세상을 이기고 그는  하나님이 당신이 이 창조물을 다 전멸시키는데 노아의 여덟 식구가 없었으면  하나님의 후사는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후사가 되어서 우주는 다 노아가  상속 받게 됐던 것입니다. 우주는 노아의 우주가 됐습니다. 홍수 후에 우주는  노아의 우주입니다.

 그 후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동행했는데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므로 모든  택한 자들의 다 조상이 되었습니다. 모든 택한자들은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습니다. 모든 택한 자들은 누구든지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고  아브라함은 그의 조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후손이나 후계나  자손이나 자기 이후로 있는 자기의 모든 후배 후손 자기에게 속한 자를 존영케  하고, 모든 소속의 성공을, 자손의 성공을, 후배의 성공을 하나님과 동행해서  성공했다 하는 것을 보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손 성공한 사람이요 후배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 이상 성공한 사람이 없습니다.

 노아의 성공은 상속권의 성공인데 우주는 아무도 차지함이 없습니다. 노아가  혼자 차지했습니다. 세상을 정죄하고 노아가 하나님의 후사가 됐다고 성경에  말씀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후사 하나님의 계대자가 됐고 하나님이 지으신  이 우주를 노아 혼자의 소유로 상속 받아서 그의 것이 되어졌습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데에서 사망을 이겼습니다.

 우리는 사망을 이기는 생명은 하나님과 동행에서만 이루어진다. 소유의 성공은  하나님과 동행에서만 이루어진다. 모든 후배 자손의 성공도 하나님과 동행에서만  이루어진다.

 우리 목회자는 많은 후배를 믿음의 자손들을 생육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이것도 목회도 하나님과 동행에서 만 성공입니다. 그 외에는 성공이 될 수가  없습니다. 소유권의 상속도 하나님의 동행에서만, 생명도 하나님 과의  동행에서만, 우리는 조그만한 구멍 가게를 하나 할지라도 하나님과 동행하면 그  구멍 가게는 살았습니다. 한 두 직공을 거느리고 있는 그 사업이라도 하나님과  동행하면 그 사업은 살았습니다. 천하에 가득 찬 죽은 거보다 그는 힘이  있습니다. 개인이나 단체나 뭐 소유나 사업이나 자기의 위신이나 지혜나  쾌락이나 성공이나 영광이나 존귀나 무엇이든지 하나님과 동행에서만 산다 하는  것을 요것을 우리에게 계시로 밝히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동행에서만  부강해진다. 하나님과 동행에서만 소유는 부해지지 다른 데는 다른 데는 부한 것  같으나 그는 가난한 자입니다. 하나님과 동행에서만 자손 성공, 후배 성공은  여기에만 있다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서 이 세 사람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을 성경에 기록해 두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래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여기에서 우리가 악한 자가 거룩한  자가될 수도 있고, 어리석은 자가 전지자도 될 수가 있고, 아주 무능자가  전능자도 될 수가 있고, 한없는 근심. 걱정. 고통 가운데에 빠져 있는 자가  세상이 빼앗아 갈 수 없는 그 기쁨을 평강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공산주의의 독침 앞에서도 그 사자와 곰과 표범 같은 그 맹수 같은 사람의 안면  앞에서도 담력을 가질 수 있는 것, 맹수의 부르짖는 거와 같은 그 악하고 독한  그 말 앞에서도 그들이 온갖 고문과 고형의 그 무서운 장치 앞에서도 담대함을  소유하고 평강을 소유하고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이 충만한 스데반과 같은  그런 안면을 가질 수 있는 것. 모든 순교자들이 다 세상이 빼앗을래야 빼앗을 수  없던 그 불란스 콜 거리에서 그 순교당한 그는 아무리 그 기쁨의 안면을 세상  고문과 고형으로 한 번 요동 시켜 볼라고 해도 요동시키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다 하나님과 동행에서만 됩니다. 하나님과 동행에서만 되지 다른 데서는 되지  않습니다.

 아침에도 우리는 이 설교를 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 되자. 동행이  그렇게 쉽게 되는 것 아니요, 쉽게 되는 것 아니고 또 동행못 할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택한 자면 다 동행할 수 있습니다. 중생된 사람은 다 동행할 수 있고  또 동행하기는 심히 어렵다면 어렵고 쉽다면 쉽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데에서 아브라함 같은 성공도 여기에서 노아와 같은 성공도 여기에서,  에녹 같은 성공도 여기에서 예수님 같은 성공도 여기에서, 금생과 내세의 성공은  다 하나님 동행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이 사실을 우리가 굳게 잡고 이 가치가 큰  것만치 우리는 거기에 투자될 그 자본도 커야 된다는 것을 우리는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소유와 몸과 생명과 어떤 것을 다 드려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  동행만은 양보하지 않겠다 하는 이 각오를 가지고 동행하면 다 동행할 수  있습니다. 단번에 동행한 사람 없고 동행하는 일을 계속 연습하고 힘쓰면 동행  못 할 사람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나를 버리고 떠나지 몬하도록 붙드는 방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시고 떠나지 못하도록 내가 붙들고 하나님이 가지 못하도록 붙드는  방편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만 기다리고 눈이 깜짝깜짝 그만 바라보고 기다리고 앉았습니다. 당신은  떠나지 못하십니다. 떠나지 못하십니다. 이 외에는 하나님을 붙들 길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사야 49장에는, 여인이 어떻게 젖 먹는 저희 자녀를 버리며  제 태에서 난 아들을 잊어 버리겠느냐 너희들은 잊어 버릴지라도 나는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주님이 선언을 했습니다.

 우리가 당신을 사모하고 있는데 당신이 어떻게 떠나겠습니까? 그렇게 주님은  냉정하신 주님이 아닙니다. 인자하신 주님이십니다. 내가 당신을 사모하고 있을  때에 당신이 사모하는 나에게 만족이 돼서 내가 이제는 참 어린 아이가 젖을  먹고 배가 부르니까 이제는 휘뜩 자고 어머니는 뭐 아무 가거나 오거나 아무  상관하지 않는 거와 같은 고런 저경에 이르면 모르지만은 당신을 사모하고  당신을 믿고 당신을 바라보고 당신에게 모든 걸 죽고 사는 당신께 다 맡겨 놓고  당신만 의지하고 그저 그분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고 앉으라 하면 앉고  그분에게 모든 걸 맡겼기 때문에 그분에게 복종하면서 그저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을 바라보고 기다리고 눈만 깜짝 깜짝하고 기다리고 있는 그것을 버리지  않습니다. 버리지 못합니다.

 여러분들 우리 하나님은 전능자십니다. 하나님은 전지자십니다. 하나님은  자존자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시요 모든 것의 주인이신 대주재입니다. 그는  주권자시요 그분은 힘으로나 강제로나 수단으로나 못 합니다. 수단 가지고  그부을 꾀울 수 없습니다. 배짱 가지고 그분을 꺾을 수 없습니다. 악독이나  강퍅이나 그 미련이나 부랑 가지고 그분을 꺾을 수 없습니다. 다만 그분을  우리가 그분을 감동시키는 거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분을 감동시키는 거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감동에 붙들립니다.

 그러기 때문에 상한 심령을 버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상한 심령을 버리지  않는다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이 주님을 우리가 붙드는 것입니다.

 주님을 붙들고 주님에게 붙들려서 동행하는 것이 어떤 것이 동행하는 것입니까?  그분을 사모하는 것이 주님과 동행입니다.

 그분이 말씀하신 그 말씀을 내가 버리지 안하고 그 말씀을 내가 버리지 안하고  그 말씀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이 그분과 동행입니다. 말라기 3장에 보면 '너희가  내 규례를 버린 것이 나를 버린 것이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한 말을  무시하고 지켜 봤자 소용 없다 하는 그것이 바로 나를 대적하는 것이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주님을 사모하고 주의 말씀을 내가 튼튼히 믿고 말씀에게 복종하고, 말씀에게  복종할 때에 나에게 말씀을 더 깨닫게 하시고 더 권위 있게 하시고 더 믿게  하시고 더 갈급하게 하시는 그 영감, 말씀으로 나에게 더 친하게 하시는 그 영감  말씀으로 나에게 더 확고하게 하시는 그 영감, 말씀으로 나에게 더 뚜렷하게  명확하게 하는 그 영감, 말씀으로 그 말씀에 대해서 내 욕망이 뜨거워지고  강하게 하는 그 영감, 내가 영감을 버리지 안하고 영감에게 복종하는데 당신 날  버리고 가지 못한다. 주님께서 나에게 죽으심으로 사죄 주시기 때문에 그 사죄를  내가 기념 하고 있는데 주님이 죽기까지 하셔서 나를 죄에서 사해 주셨으니 나는  주님이 주신 사죄를 나는 만 인간 앞에서 기념합니다. 주님은 나를 죄에서  대형해서 사해 주셨다, 내 죄를 벗겨 주셨다는 것을 만 인간 앞에서 내가  기념하겠습니다. 주님이 내 죄 벗겨 주신 것을 만 인간 앞에 증거하여 어떤 강한  죄악이 와도 주님이 나를 죄에서 벗겨 주셨으니 나는 죄에 다시 억매이고 다시  죄를 씻을 수 없다. 사죄를 기념하고,  주님이 죽으심으로 나에게 의롭다 하신 그 칭의를 기념해서 아 주님이  죽으심으로 나에게 의를 입혀 주신 의, 이 의, 내가 주의 말씀을 복종함으로 이  의가 간수되고 주님의 말씀에 복종을 떠나므로 이 의가 내게서는 떠나게 되는  것이니 내가 내게 주신 의를 기념하고  주님이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의 제물 되셔 가지고서 하나님이 내 아버지  되셨고. 아버지와 나와 얼마든지 대화할 수 있고 내 모든 것을 다 고할 수 있어  이 친밀한 화평을 주신 이 아버지를 떠날 수 없다. 이 하나님을 떠날 수 없다.

하나님으로 더불어 영교를 끊지 않고 하나님 모시고 하나님 자기 안에 계시는  것을 자기가 깨닫고 자기도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을 깨달아 하나님과 자기와 동거  동행하는 것을 믿을 때에 그분은 버리고 떠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라면서 생각해 가니까 감사하지 안할 수 없습니다. '또, 주님 감사합니다.'  내가 깨달아서 그분이 내게 하신 일을 내가 감사하는데 그분이 나를 떠나지  못합니다. 이것이 주님과 동행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잘못된 거 '아이구 주님 내가 이거 잘못했습니다. 과거의 요거  조거 잘못됐습니다. 용서해 주옵소서.' 사죄를 구하는 자에게 주의 피의 사죄를  구하는 자에게 그분이 버리고 떠나지 않습니다.

 모든 사정을 아낌없이 다 고해라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는다 얼마든지 구하라,  의논의 상대가 되어 주마 하신 그 주님 앞에 이런 사정 저런 사정 '주여 내  형편이 이렇습니다. 요새는 이런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이런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 일을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당신에게 묻는데 당신이 어떻게  떠나겠습니까? 모든 사정을 고하는 자를 떠나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보니까 '우리는 당신이 아니면 안 될 문제 많습니다. 주님이여 나는  자격 없지만 주의 피공로를 인해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걸 들어  주시옵소서.' 하면서 간구할 때에 그분은 우리를 놓지 않습니다.

 이것이 주님과 우리와의 동행인 것입니다.

 이 일을 자꾸 합시다. 자꾸 쉴새 없이, 우리가 밥 먹는 것은 밥 먹으면서  주님을 붙드는 일을 밥 먹으면서 하고, 주님과 동행을 밥 먹으면서 하고, 우리는  길 가면서 주님을 놓지 말고 길 가면서 주님과 동행하고, 우리는 이런 일 저런  일을 하는 그 일에서 주님과 동행하고 주님 붙들고 모시고, 내가 급할 때도 급한  일도 그 급한 일, 일이야 급하지만 급한 일, 그급 한 일에서 나 주님 사모하고  주님 동행하고 주님 바라보고 주님 의지하고, 주님이 나와의 관계 가진 그 열  가지의 관계, 주님 나와 관계 가진 그 일곱 가지의 관계를 내가 가지면서 무슨  일 하는 데서든지 그 일에서 나는 그 일은 장소에 불과하고, 그 일은 장소에  불과하고, 그 사건은 장소에 불과하고, 그 현실은 내가 주님과 동행하는 그 하나  길에 불과하고. 그러면 그 길에서 나는 주님과 동행하고 그 길에서 주님과 나는  같이 동거하고 하는 이것이 우리가 되는 이것보다 주님이 더 요구하시는 것도  없고 성공하는 비결도 없습니다.

 그래 이것을 자꾸 우리는 연습해야 되겠습니다.

 그저 연습해서 다른 사람이 뭐라 하든지 계속해서 주님 사모를 계속합시다.

주님 사모를 계속합시다. 주님을 믿는 것을 계속합시다. '주여 믿습니다.

자존하신 주님을 믿습니다. 주님이 천지 창조한 걸 내가 믿습니다. 주님은  전능자이심을 내가 믿습니다. 전지전능을 내가 믿습니다. 나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대속하심을 믿습니다. 지금도 주님이 모든 것을 주권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도 주님이 다 주권으로 섭리하고 있음을 믿습니다.

주님은 나와 함께 있음을 믿습니다.' 주님을 믿는 연습을 우리는 자꾸해서 우리  마음에 가득 차고 우리 몸에 가득 차도록, '나는 주님만을 바라봅니다. 주님만을  바라봅니다.' 말로만 주님 바라본다고 할 것이 아니라 '이것도 아, 주님이 해  주실수 있다. 저것도 주님이 해 주실수 있다. 모든 거 주님이 다 해 주실수  있다. 모든 거 다 주님의 것. 주님을 바랍니다.' 주님이 이것도 '이거 네가  어째?' '아, 주님이 해 주실수 있다, 주님이 해 주신다, 주님이 약속했다,  주님이 해 주시기로 약속했다.' 모든 것의 약속대로 당신을 바라고, 당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당신을 의지하고, 당신 하나하나 시키시는 대로 꼬박꼬박  복종하면서. 내 마음대로 오늘 됐으면 좋겠다, 이 자리 됐으면 좋겠다, 당장  됐으면 좋겠다가 아니라 '나는 그것도 모릅니다. 언제 내가 소원하는 소원을  당신이 이루어 주셔야 좋을란지 그 시기를 모릅니다. 모르나 분명히 그 분이  전지하신 지혜로 내게 주시되 가장 복되고 적절한 그 시기에 줄 그 사랑을  믿습니다. 그 지혜를 믿습니다. 그 신실을 믿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붙들고 놓지 아니하는 이 일을 우리가 연습해서 그런 에녹이  동행하면서 가정 생활했고 벌이도 했겠고 사업도 했겠고 모든 거 했겠습니다.

그런 그거하면서 동행했습니다. 자녀를 낳으면서 동행했습니다.

 우리는 땅 위에서 모든 활동, 모든 생활, 모든 경영, 모든 접촉, 모든 현실  이것이 다 내가 주님을 붙드는 붙들고 놓지 않는 얍복 강가에서 야곱은 그는  주님을 붙들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요,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만났으나 죽임을 당하지 안했다' 마지막에 알았다. 그는 그 하나님이  어떠한지 모르고 주님을 붙들었습니다. 붙들고 '아무래도 나를 살려 줘야  되겠습니다.' 괜찮다. 염려 없이 가거라 가거라 해도 놓지 안하고 그라니까  마지막에는 날이 새 가니까 야곱을 환도뼈를 쳐서 병신이 돼도. 안 놓았습니다.

병신이 돼도 안 놨어. 안 놓고 '나를 축복해 주시옵소서' 할 때에 '내가 이제  당신이 된다 한 것을 내가 고집해 가지고서 내가 불신했던 죄를 자복합니다.

이제는 내가 당신이 가면 된다고 하기 때문에 내가 담대히 내가에서에게  가겠습니다. 나를 축복하시옵소서.' 할 때에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라'  하는 그 새이름을 그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생활이 당신을 붙들고 놓지 않는 생활되게 합시다. 당신을  붙들고 놓지 않는 생활되게 하고, 우리는 모든 생활이 당신과 동행하는 생활  되도록 합시다.

 우리가 당신 사모하면 나 혼자 두고 못 갑니다. 내가 사모가 뚝 끊어져야 '어,  나는 나 볼 일 보겠다' 가시지. 그게 끊어졌을 때에는 당신은 번개 같이  달아납니다. 번개 같이 달아나. 그러나 내가 당신을 사모하고 있을 때는 안 돼.

 내가 이 말씀을 붙들고 말씀을 불들고 지금 말씀대로 내가 순종할라고 이  말씀대로 어떻게 순종할까? 그 말씀을 지금 내가 궁구하면서 말씀대로  순종할라고 애를 쓸 때는 그 말씀을 붙들어 말씀을, 내가 붙든 그 말씀을 놓고  당신은 떠나지 못합니다. 말씀과 당신은 분리할 수가 없습니다. 나눠 지지 못해.

내가 말씀을 믿지 안할 때에 내가 성경을 백 독 읽고 내가 암만 외워도 당신은  떠날 수 있지마는 요 말씀을 잡고 요 말씀대로 내가 복종하겠습니다. 하고 요  말씀대로 복종할라고 하는 자를 떠나지 못합니다.

 그 말씀을 더 나에게 진하게 깨닫게 하고 확고하게 깨닫게 하고 권위 있게  깨닫게 하고 내 주관이 더 그 말씀의 상대자로서 내가 내 주관의 말씀을  상대하는 내 주관이 더 강하게 하는 것이 그것이 성신의 감화입니다. 다른게  성신의 감화가 아니고 그게 성신의 감화요, 성신이 딴데 있지 안하고 그게  성신의 감화요, 그 영감을 내가 놓지 안하고 영감에게 복종할라고 애를 쓰고  영감에게 복종할라고 애를 쓰는 자를 영감에게 복종시키기 위해서 온 영감인데  어떻게 나를 떠나겠습니까?  내가 당신이 주신 사죄를 내가 기념할라고 발발 떨면서 이 사죄를 벗지 않게  해달라고 이 사죄를 뺏기지 않게 해 달라고 이 사죄를 만 인간에게 자랑해서  천천 만만의 세력이 이 사죄를 빼앗을라고 벗으라고 해도 목이 끊겼으면 목이  끊겼지 나는 사죄를 벗지 않고 사죄를 기념하겠습니다. 칭의를 기념하겠습니다.

하나님과의 화친을 기념하겠습니다. 하는 그 자를 놓고 가지를 못합니다.

 '아, 주님, 이렇게 하셨으니 이모 저모에서 주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감사하다는 그 자에게 당신이 원하시는 것이 감사 인데 당신의  은혜를 아는 것을 제일 당신이 원하시고 계시는데 그걸 알아야 되는데 감사하고  있는 자를 어떻게 떠나겠습니까? 잘못됐다고 용서해 달라고 사과하는 자에게  어떻게 떠나겠습니까? 이것 저것 물어서 좀 의논 할라고 이렇습니까,  저렇습니까? 문의하고 의논할라 하는 자에게 어떻게 떠나겠습니까? 내가  당신에게 간구하는 자에게 어떻게 떠나겠습니까?  우리는 어쨌든지 우리는 이 주님을 놓지 안하고 떠날 사이 없이 잡고 계시고  그분과 동행만 하면 우리는 변화됩니다. 주님과 동행으로써 에녹이 생명 성공을  했고 노아가 기업 성공을 했고, 아브라함이 자손 성공을 했는데 우리는 이거면  다입니다. 그외에 않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고로, 다른 사람이 미쳤다 하든지 말든지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이 일이  잘되고 못 되는 그게 내 일이 아니라 거기에서 주님 잊어 버리느냐 안 잊어  버리느냐 주님과 동행하느냐, 여기에서 완전과 동행하면 차차 완전해 지지, 참과  동행하면 점점 참화되어지지, 거룩과 동행되면 거룩화되지,지 극히 공평과  동행하면은 공평자 되어지지, 성결과 동행하면은 성결 되어 지지, 그분 동행해서  손해갈 것 없고 그분 주고 바꿀 것 없습니다. 그분보 다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실 분이 없습니다. 그분보다 내가 지능적으로 나 모든 도량적으로나 모든  권위적으로 그분을 접촉하는 것보다 내가 가속 도로 내가 커지고 넓어질 자  없습니다. 그분과 동행하는 자, 이 우주가 그 분과 동행하는 자 속에는 우주가  천 개 만 개가 들어가도 그 동행하는 그 속에 차지 않습니다. 차지 않습니다.

능히 우주를 주먹에 거머쥐고 주물면서 영원히 상속해서 통치할 수 있는 권위가  있는 자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어짜든지 주님 놓지 맙시다. 주님과 동행하는 이 일을 우리가 빨리  빨리 속성해서 연습하고 숙달해서 어데서든지 독침 앞에서도 주님과 동행하고,  다급할 때도 동행하고, 아무리 세상이 좋은 거 갖다줘서 존귀해서 마구 좋아서  정신빠질 만치 돼도 그분과 동행하고 어데서든지 그저 내 앞에 닥치는 이런 저런  주님이 주시는 대로의 수많은 그 바꾸어지는 온갖 현실 속에서도 그분과  동행하는 것을 놓지 않는 요것이 완전히 완성이 되면 연성이 되어지면 요것이  완전히 성공이 되어지면 주님이 만족하시고 우리는 만족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땅위에서 허락하신 지극히 큰 소망을 받은 우리들인 것입니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선지자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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