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6 00:15
성령 세례
1986. 6. 15. 주일오후
본문:사도행전 1장 4절∼9절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는 그 마지막 시간에 마지막 말씀으로 전하고 승천하셨습니다. 승천의 유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지 아니하면 예수님의 증거를 할 수 없습니다.
성령으로 세례 받는다는 말은 성령님의 능력으로 옛사람은 죽어 장사 지낸 거와같이 완전히 죽여 버리고 피와 성령과 진리로 살아난 새사람으로 사는 것을 가리켜서 성령 세례라 그렇게 합니다.
옛사람은 자기 중심의 악령과, 유혹받아서 자기 중심 위주의 인간성과, 악령과 자기 중심으로 말미암아 행동한 모든 죄 그 악습을 완전히 죽여 버리고 벗는 데에는 하나님이신 성령님의 권능이 아니면 안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옛사람으로 예수 믿는 사람도 있고 새사람으로 예수 믿는 사람도 있고 옛사람과 새사람으로 교체해 가면서 엇바꿔 그렇게 예수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악령의 감화받고 자기 중심으로 자기 위주로, 피조물 중심 피조물 위주로 사는 생활은 다 옛사람이 사는 생활이요 안 믿는 사람들이 사는 생활입니다. 성령 없는 악령으로 사는 생활이요, 변질된 사람이 사는 생활이요, 악령과 변질된 사람이 행동한 그 구습, 구습, 그 습성 그 버르징이 이런 것으로 사는 생활입니다.
새사람으로 사는 새사람이 아니면 성령의 권능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새사람은 성령의 권능을 좋아하고 받지마는 옛사람은 성령의 권능을 제일 미워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 가운데에 성령의 권능의 생활을 미워하는 사람도 있고 심히 소원하는 사람도 있으니 미워하는 사람은 옛사람이 예수를 믿는 까닭이요, 소원하고 자기 모든 것을 다 투자하여서라도 성령의 능력으로 살고자 하는 그 사람은 새사람으로 사는 까닭입니다.
성령의 권능을 받지 아니하면 예수님의 증인노릇은 하지를 못합니다. 성령의 권능을 받을라면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살아나는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례 받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고, 또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하는 이 권능 받는 것이 중요하고, 또 예수님의 증인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증인이 되면 예수님께서 이기시고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당신의 것을 삼으시고 천상 천하의 모든 것을 구원한 구주가 되어서 아버지 보좌 우편에 앉은 거와같이 예수님의 증인된 사람들도 모든 피조물의 구주가 되어지고 주님의 보좌 우편에 앉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서, 주님의 영광에 동참하고, 주님의 환영에, 존귀에 동참하고, 예수님의 권위에 동참하고, 예수님의 온갖 봉사의 시은 역사, 은혜를 베푸는 시은 역사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는 사람은 성령의 세례와 성령의 권능으로 예수님의 증인 생활이 이 세상에서 성공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을라고 하면 그 준비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아니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나는 고난을 피하지 말라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에 일어난 고난은 어떤 고난인가? 예수님이 택자를 대속하시느라고 십자가의 죽으심과 대속하신 그 구원을 각자들에게 입혀서 구원을 입고 사는 자 되도록 하시기 위해서 삼 일 만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그때에 일어난 고난과 박해는 예수님의 사활의 이 공로를 자기 것으로 삼는 사람들에게 한하여서만 고난이 되었고 누구든지 이 공로를 배반해 버리는 자에게는 아무런 고난이 없었습니다.
그런고로 오늘도, 누구든지 예수님의 대속하신, 이 죽으시고 살아나신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자기 것인 것을 깨닫고 자기 것으로 입고 살라고 할 때에 일어나는 환난이 있고, 또 이 대속하신 공로를 벗지 아니할라고 할 때에 일어나는 고난이 있습니다.
이 고난이 자기에게 있으면 예수님의 대속을 바로 믿고 가진 증거요 이 사활의 대속으로 인한 세상 박해가 없으면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은 줄로 생각한다 할지라도 그에게는 대속의 공로가 저와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악령과 세상이 잘 알기 때문에 그에게는 박해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 대속으로 말미암은 여러 가지 그 고난, 환난과 핍박과 대적과 이 온갖 죽이고 살리는 이런 어려움이 예수 믿는 사람은 당하기 마련입니다. 예루살렘에서 그때에 사도 요한의 형 야고보도 죽임을 받았고 스데반도 죽임을 받았습니다. 그때에 많은 성도들이 박해를 당했습니다.
이 박해를 떠나는 것은, 이 박해를 제가 예루살렘에 있으면서라도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제가 부인하고 믿는 자가 아니면 이 박해는 즉시 없어집니다. 이 대속의 공로를 버리지 아니하고, 자기의 대속의 공로인 것을 믿고, 대속을 입고 살고 벗지 안할라고 하는 데에서만 박해가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벗지 않는다고 해서 어떻게 해서 박해가 올 것인가? 예수님의 대속을 벗지 않는 것은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는 어겨 죄 짓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대속을 벗지 않는 것이요, 다시는 자기 생각이나 어떤 피조물들의 생각대로 살지 않는 것이 그것이 대속을 벗지 않는 것이요, 다시는 악령의 유혹을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따라서 사는 그것이 사죄의 공로를 벗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살라고 하는 데에는 좋아하는 부부간에도 박해가 있고, 형제간에도 박해가 있고, 같은 직원끼리도 박해가 있고, 아무리 친근한 사람이라도, 상관없는 타타인 남이라도 공연히 박해가 있는 것입니다. 그는 악령과 악성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또,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살려고 하는 것이 대속을 입을라고 하는 것이요, 성령의 인도 따라 사는 것이 대속을, 대행의 칭의를 입고 사는 것이기 때문에, 또 하나님으로 더불어 동행하고 마귀를 완전히 배격해서 버린 그것이 하나님과 화친 생활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생활은 필연적으로 마귀와 죄와 사망으로 되어 있는 이 세상에서 마찰이 될 수밖에 없고 박해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거는 필연한 결과입니다.
그럴 때에 사람들은 예수님의 세 가지 사죄와 두 가지 행위를 자기가 입고 살려고 하면 박해가 오나 벗지 안할라고 다 애를 쓰다가 너무 고난이 심하니까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벗고 안 믿는 사람과 같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이 말씀은 이 사죄, 칭의, 화친의 대속의 공로를 입고 삶을 인해서 가정에서, 사회에서, 직장에서, 국가에서, 세계에서, 모든 종교계에서 여러 가지 종류의 대립의 박해가 일어날 때에 그때에 네가 그 박해를 피하지 말아라 하는 그말은 그 박해가 일어난다고 해서 주님의 대속을 벗지 말고 그대로 주님의 대속을 네가 입고 간직하고 있어라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것을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뭣 되느냐? 그러면 성령이 그 사람에게 와서 세례 줄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성령을 영접할 수 있습니다. 왜? 예수님의 대속을 어떻게 세상이 반대해도 벗지 않는 것은 예수님의 대속을 확실히 자기의 대속인 것을 깨닫고 이 공로를 놓지 안하고 입고 있는 자이기 때문에 이 대속으로 인하여 오는 성령님이 그 사람에게 오실 수 있고, 그 사람에게 세례 주는 역사를 할 수 있고, 또 그 사람은 성령이 세례 주는 그 세례를 받을 자격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대속의 이 세 가지 진노를 풀고 또 두 가지 소원하는 소원을 이루어서 세 가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이 대속의 공로를 자기 공로인 것을 아는 사람은 그 사람은 이 댓가에 팔린 자기이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 것이 아니라 자기는 대속하신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자신이 대속을 벗는 것은 악령 악성 악습으로 사는 것이고 대속을 입고 사는 것은 피와 성령과 진리로 중생된 사람으로 사는 것인 것을 알기 때문에 어려움을 당해도 이 사상과 이 주의와 이 행위를 벗어 버리지 아니할 때에 그때에 성령은 그에게 와 가지고 옛사람을 죽이고 새사람으로 살게 하는 그 돕는 역사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령으로 세례 받기 전에 대속으로 말미암은 고난을 벗지 안하고 이 고난을 입고 있어야 합니다. 이 고난이 없으면 대속을 바로 입지 안했다는 증거요 대속을 바로 입었으면 반드시 그 결과는 박해가 있는 것입니다.
그 박해가 있을 때에 여러 가지 어려운 박해가 있어도 대속을 벗지 않는 것은 대속을 확신하고 소망하는 증거요, 대속을 벗지 안하고 확신하고 소망하는 것은 성령으로 중생될 수 있는, 성령으로 세례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도우심을 입어 가지고 옛사람은 죽이고 새사람으로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수십 년 예수를 믿고 목사노릇하고 장로노릇하고 권사 권찰노릇을 해도 옛사람으로 사는 생활은 다 적기독입니다. 예수교라는 이름은 가졌으나 예수교의 정반대요 원수의 생활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외식이라고도 하고 혈육의 사람이라고도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도 기독교 가운데에는 옛사람으로 신앙 생활하는 모든 교인도 있고 성직자들도 있고 새사람으로 교인 생활, 성직 생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증거는 뭘로 보고 알 수 있느냐 하면 대속의 공로로 말미암은 박해가 없는 것이 옛사람으로 사는 증거요, 박해가 있을 때에 대속을 벗어 버리는 것이 옛사람으로 돌아가는 증거요, 박해가 아무리 있어서 마지막 생명이 끊겨지는 데 나아가도 생명을 버렸지 이 대속을 버리지 않는 사람은 그것은 박해로 인해서 대속을 버리지 않는 것이 대속을 확실히 믿고 소망하는 증거이니 그 사람은 성령이 오셔 가지고 옛사람을 죽일 수 있고 새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되지 안한 사람을 옛사람을 죽일라고 하면 그 사람이 칼을 들고 달라듭니다. 옛사람을 죽일라 하면 성령을 눈에 안 보여 그렇지 보이면 칼로 가지고 성령을 목을 벨 것입니다. 옛사람을 죽일라 하면 성령을 목을 벨 것입니다. 옛사람을 죽일라 하면 목사를 창으로 찌릅니다. 옛사람을 죽일라 하면 목사를 앉는 자리마다 욕합니다. 훼방합니다. 새사람으로 살리는 이 일을 달게 받지 안하니까 성령이 와서 성령 세례를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의 성령 세례 받는 준비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대속으로 말미암은 박해가 일어나기까지 예수를 믿고, 일어날 때에 이 박해로 인해서 대속을 벗지 안하면 성령의 세례를 받을 수 있는 준비를 갖춘 사람입니다. 이래서, 성령으로 중생됐으면 자체 구원이 된 사람입니다. 자기의 영육이 구원이 된 사람이니 자체 대속을 받아서 자체 구원이 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옛사람을 죽이고 새사람으로 이렇게 사는 것이 신앙 생활의 권능이요, 이렇게 산 생활이 무궁세계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 세례 받고 난 다음에는 이제는 성령의 권능을 받아야 되는데 성령의 권능 받는 것은 그 준비를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 준비는,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할 때에 이스라엘의 회복의 때는 아버지가 자기의 권한에 두셨기 때문에 너희의 알 바 아니요 하신 말씀대로 자기에게 있어서 경제면으로나 신체면으로나 사업면으로나 활동면으로나 사회면으로나 가정면으로나 어떤 면으로든지 자기의 사적 어려움이라는 그 사적 소원이라는 그 모든 소원을 버리지 안하면 안 됩니다. 요것도 어려운 말입니다. 버리지 안하면 안 됩니다.
그것을 버리지 안하고 그 소원을 가진다고 해서 이루어지느냐 하면 절대 안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지 안하고 사랑하는 자에게는 그렇게 그것이 이루어지면 그 사람이 멸망을 받기 때문에, 자살을 지금 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주님이 이루어 주시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아버지에게 맡겨야 됩니다. 주님에게 맡겨 놓고 이제는, 그것만 다 주님에게 맡겨 놓고 그 모든 사욕의 소원, 소욕 그것을 버려야 성령의 권능을 받는 것입니다.
요걸 똑똑히 배워야 되지 오늘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강단에서, 구름덩이같이 사람들이 모아드는 것은 그 사람의 사욕의 소원 성취가 이루어진다고, 사욕 소원을 이루어 준다고 하니까 사욕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모이는 사람들이요, 또 사욕에 대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면 제 모가치가 되고 제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해 가지고서 기뻐 뛰고 굴리는 것입니다. 실은 그것은 연극의 사람을 기만해서 속이는 것이지 내나 옛사람 생활이니까 이름만 가졌지 불신자의 생활, 멸망의 생활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래서, 성령의 권능 받는 것은 자기의 사욕과 주관을 버려야 됩니다. 사욕과 주관을 버리고 이제는 성령의 권능 얻기를 원해야 됩니다.
성령의 권능은 어떤 것인가? 성령의 권능은 사욕과 주관을 죽이는 권능이요, 사욕과 주관의 소원대로 하나도 하지 않는 권능이요, 곧 주님이 소원하시는 그 소원대로의 하는 권능이기 때문에 옛사람의 원수입니다. 옛사람이 죽지 안하는 자는 이것에게 방해를 받아서 못 합니다. 옛사람을 죽인 자는 방해 받지 안하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 그것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기 때문에 너는 알 것도 상관할 것도 없고 다만 성령의 권능이 오면 너희들이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증인되는 것은 이것은 행동을 말하는 것인데, 증인되는 것은 행동을 말하는 것인데 이렇게 성령 세례를 받은 자라야 성령의 권능 곧 예수님의 증인 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활은 육적으로 산 것 아니고 전부이 성령으로 산 것이 예수님의 생애입니다.
예수님의 증인노릇하는 것은 어떤 것이 예수님의 증인노릇하는 것인고 하니,ㅡ요것 조금 어렵습니다.ㅡ예수님의 증인노릇한 것은 세 가지를 작정하고 세 가지가 이루어져야 예수님의 증인 자격이 있고 증인노릇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 가지가 이루어져야 예수님의 증인노릇을 하게 됩니다.
세 가지 이루어지는 것이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전적 아버지만 상대한 거와같이 성령이 오시면 우리를 전적 주님만 상대하게 하십니다. 천지 만물도 상대하지 안하고 정권자도 상대하지 안하고 가족도 상대하지 안하고 자체도 상대하지 안하고 천군 천사도 상대하지 안하고 모든 피조물 아무것도 상대하지 안하고 주님만 상대해서 주님만 짝이 됩니다. 주님하고만 짝이 됩니다. 주님만 마주 삽니다. 주님만 짝이 됩니다.
이렇게 주님만 상대한 자가 되면 필연적으로 자신은 주님에게 다 전임으로 맡기게 됩니다. 주님만 상대하면 자신은 주님에게 전담을 하게 됩니다.
또, 자기의 행위는 주님으로 인하여서 복종하는 행위를 하게 됩니다. 요 세 가지가 됩니다.
요 세 가지가 되면, 요 세 가지가 된 예수님의 행위는 어찌 했던가? 예수님의 행위는 곧 상대하는 아버지가 ‘너는 자기의 죄와 허물, 악령 악성 악습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멸망 가운데 빠져 있는 내 백성을 네가 그 멸망에서 구출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구출할 수 있느냐? 아버지만 상대하지 안했으면 주님은 그런 일을 거부할 것입니다. 아버지만 상대했기 때문에 주님은 ‘예, 내가 그 범죄로 하나님을 세 가지 노엽게 한 죄로 멸망받은 그 멸망에서 구출하겠습니다.
또 아버지가 소원하는 세 가지를 이루어서 그들을 다 영생케 하겠습니다.’ 하는 것을 담당한 것이 아버지만 상대한 그 결과로 그렇게 요 소망과 목적을 가졌습니다.
그 소망과 목적을 가졌을 때에 만일 예수님 자신을 아버지에게 완전히 맡기지 못했으면 이 일은 못 합니다. 맡기지 못했으면 자신이 염려돼서 안 됩니다.
완전히 자신을 살거나 죽거나 어떻게 할지라도 완전히 맡겼기 때문에 이 일이 성공되는 십자가의 저주의 사망도 달게 받아서 했던 것입니다.
또, 아버지에게 복종하는 이 생활을 하기 때문에 하늘나라의 지극히 큰 존영한 권세를 다 내놨습니다. 또 그 부요를 다 내놨습니다. 또 그 영광을 다 내놨습니다.
도성 인신한 것이 아버지의 명령 순종입니다. 신인 양성 일위된 것이 아버지의 명령입니다.
그리하여 세상에서 사생활 삼십 년은 인간이 사생활에서 범죄함으로 멸망한 그 사생활 대속할라고 하니까 사생활 삼십 년을 당신 소원대로는 털끝만치도 하지 못하고 당신이 원치 않은 아버지의 소원대로 삼십 년 사생활을 했고 삼 년 사 개월 공생활을 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낮아지신 것은 우리들이 죄를 지어도 존귀해지려는 이 죄값을 내는 데에는 당신이 낮아져야 되고, 우리가 범죄해도 부강해지려는 이 범죄를 대속하는 데에는 당신이 가난해져야 되겠고, 또 인간들이 이런 영광, 존귀, 취미, 제 사욕, 주관, 자율대로 하는 이것으로 말미암아 멸망받았기 때문에 이 댓가를 내는 데는 완전하신 하나님이 당신의 자율대로 하나도 못 했고, 주관대로도 하나도 못 했고 순전히 아버지가 죽으라면 죽고 살라 하면 사는 고대로 했지 대신해서 이 댓가를 낸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이 대속하시는 데에는 간단하게 말해서 모든 존귀와 권세와 부요를 다 내어 놓으심으로 우리의 대속의 공로가 설정됐고 또 억울함과 애매함과 멸시와 침뱉음을 당하고 뺨침을 당하고 채찍으로 깔림을 당하고 가시관에 씌여서 머리에 전체가 피가 흐르고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고 손과 발에 못을 박고 저주의 사망을 이렇게 당하셨으므로 우리를 완전히 사죄, 칭의, 화친의 대속을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은 이렇게 해 가지고 대속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어떻게 이 세 가지 이 대속을 이루었을까? 이룬 것은 당신을 완전히 아버지에게 맡겼기 때문에 이 일이 가능했고, 아버지 한 분만을 상대했기 때문에 이 일이 가능했고,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것만 했기 때문에 이 일이 가능했습니다. 그리 안 하면 이 일이 이루어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증인노릇하는 것이 어떤 것이 예수님의 증인노릇 하는 것인고 하니 예수님이 이렇게 큰 사랑, 큰 힘 들여 가지고서 큰 고난으로 나에게 대속해 주신 것이기 때문에 내가 이 대속을 보존할라고 할 때에 이런 종류대로의 온갖 어려움이 와도 내가 어려움 겪었지 대속을 내어 주지 않고 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이 대속을 보수 보존하는 것을 세상에게 보여 주는 것이 이것이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증인입니다.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대속 그까짓 게 뭐인데 대속 때문이라고’대속은 뭐이 대속인데? 대속은 영감이 대속을 가져 왔고, 진리가 대속을 가져 왔기 때문에 진리 한 마디 한 마디가 바로 대속 그 자체입니다. 그 분자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저 사람은 성경 그게 뭐인데 성경 때문에 죽임을 당하고 성경 때문에 감옥에 갇히고, 성경 때문에 억울하게 멸시 천대를 받고, 그까짓 것 손으로 문태면 뒈질 것 아무것도 아닌 것한테다가 말할 수 없는 천대도 받고 이렇게 하는 것이 뭣 때문일까? 그 사람은 그 성경 그것이 자기의 대속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대속을 위해서 대속을 주지 않기 위해서, 대속을 뺏기지 않기 위해서 그와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왜? 어떤 모든 박해와 어려움이 올 때에 그 어려움이 어렵지마는 그 어려움을 내가 그것을 피할라고 하면 내대로 살았기 때문에 대속은 천 리 만 리 떠나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그 대속을 내가 내어 주지 안하고 보존할라 하니까 나는 그 멸시를 견뎌야 되겠고 그 천대를 견뎌야 되겠고 그 억울함을 견뎌야 되겠고 그 매를 맞아야 되겠고 감옥에 갇혀야 되겠고 그 죽임을 당해야 되겠고 그렇게 억만금을 가진 부자라도 부자의 세력을 부리지 못하고 부자노릇을 하지 못하고 억만금의 부자이면서도 항상 저는 가난하게 지내고 지극히 존귀한 권세를 가졌지마는서도 권세 아무것도 가지지 안하는 자로 살 수밖에 없는 그것이 세상에게 보여 주는 증인입니다. 예수님의 증인입니다.
이것이 내가 입은 예수님의 대속을 이렇게 이 대속은 이렇게 이렇게 해 가지고서 베푸신 대속인 것을 다른 사람에게, 이런 어려움이 있어도 대속을 벗지 아니함을 인해서 과연 그리그리 해 가지고서, 그 어려움을 가지고서 대속하신 대속이라 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 주는 이것이 대속을 입는 것으로서 대속을 그 사람들에게 대속이 어떻게 된 대속을 보여 주는 것이요, 또, 내가 이 대속을 받았으니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내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이것이니라’ 말씀하신 그대로 주님의 이 대속을 받았기 때문에 대속하신 분이 이 대속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주라고 말씀하시니 나는 또 이 대속을 전해 주지 안할 수 없습니다. 그분이 나를 대속하신 그 사랑으로 변화되고 보니까 나도 그 대속의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안할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대속을 전할 때에 어떻게 전하는가? 주님이 나를 대속하시기 위한 그 순서, 그 방식, 또 그 종류, 그 모든 개별 개별의 그 성질, 고대로의 해서 나를 대속하셨기 때문에 이 대속을 전하는 데에는 나도 그대로의 방편, 그대로의 종류, 그대로의 제물이 되지 안하면, 그대로의 내가 낮아지고 가난해지고 천해지고 멸시와 천대를 받고 억울함을 당하고 박해를 당하고 뺨 때림을, 침 뱉음을, 창으로 찔림을, 못으로 박힘을 온갖, 이 구원이 하늘에서부터 올 때에 그게 아니면 올 수 없는 구원이기 때문에 그걸로 왔고, 내가 이 구원을 보존하는 데에도 그 성질과 방식이 아니면 이거는 보존할 수가 없는 것이고, 이 구원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데도 이 방식이 빠짐 없이 이대로 되는 요대로만 구원을 전해 줄 수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성령의 권능이 아니면 못 하는 것입니다. 성령 세례 받은 새사람이 아니면 못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증인입니다.
예수님의 증인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어떻게 해 가지고서 나에게 이 대속을 이루어 주셨는가 하는 것을 세상에게 내가 이 대속을 보존하면서 보여 주는 것이 증인이요 이 대속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주면서 어떻게 전해 주느냐? 예수님이 이렇게 전해 줬기 때문에 그 식대로의 전해 주는 것으로서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그 방식을 그대로 하는 것으로서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에게, 이 사람이 권세 있는 고관대작입니다. 왕입니다. 왕이 어떤 천인에게 이 대속을 전해 줄라고 합니다. 전해 줄라고 하니까 마귀란 놈은 촉분을 지르는 것이기 때문에 그 천한 인간이 왕에게 대해서 ‘뭐 네까짓 게 뭐인데 나한테 예수 믿어 구원 얻으라 하느냐?’ 욕질을 합니다. 나중에, 예를 들면은 침을 뱉습니다. ‘더러운 놈 나한테 뭐 그런 대속을, 뭐 대속이니 그까짓 소리하고 있느냐?’ 뺨을 때립니다. 뺨을 때리고 침을 뱉고 이렇게 욕질을 합니다.
당장 ‘나는 왕이다. 이놈 사형해라.’ 하면 사형할 수 있습니다. 사형은 할 수 있지마는서도 그럴 때에 예수님의 대속을 나는 벗었고, 그 사람은 ‘아이구 그렇습니까? 내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하지마는서도, 죽을 죄를 지었으니 내가 잘못했습니다 하나 예수님의 대속은 그에게 가지를 못합니다. 안 갑니다.
대속을 그에 줄라 하면 그렇게 안 할 수 없고, 거게서 내 권세를 쓰면 나는 벌써 예수님의 대속의 본질과 본성에 이질이 될 뿐만 아니라, 이질이 될 뿐만 아니라 내가 죽어 희생해서 그를 살리는 것인데 내가 살아서 내 권리 부릴대로 부리고 세력 부리고 내가 살았으니까 그분을 그 멸망 가운데서 구출 할 수 있는 댓가가 없습니다. 그 방편이 없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있어도 없는 줄 알고, 그 사람이 있다가 ‘아이구 내가 알고 보니까 아니로구먼요. 잘못했습니다.’ ‘아니, 아니 그렇지 안해. 내가 왕이면 무슨 상관이며 왕이면 무슨 상관 있어? 나는 자기에게 도를 전하러 왔으니까 그런 소리 하지 마.’ ‘아이구 내가 뺨을 때렸는데' `아, 상관하지마.' `내가 침을 뱉았는데요’ ‘아이구 상관하지마. 자기가 몰라 그렇지.' 이러니까 어짜든지 예수 믿으라고 자기의 권세를 완전히 없애 버릴 때에 그에게 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구원은 건너가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렇게 주님이 이 대속을 내게 주실 때에 그렇게 안 하고는 안 돼.
왜? 안 하고는 대속의 댓가가 안 돼. 내가 전부이 저질러 놓은 일이기 때문에 내가 높아지기 위해서 범죄한 그 댓가를 낼라 하니까 주님이 낮아져야 댓가 내지, 내가 다른 사람에게 욕 얻어 먹을 수 있는 일을 욕 얻어 먹지 안할라고 함으로 말미암아 이제 범죄했기 때문에 내가 그 욕을 안 얻어 먹을 욕을 얻어 먹어야 그게 대속이 된다 말이오. 알아 듣겠습니까? 예수님의 대속은 다 이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렇게 당하시는 그 모든 고난이 아니고는 댓가를 치를 수 없기 때문에 그 댓가를 치러서 우리를 대속했고 그 대속을 내가 보존할라고 하는 데에는 나는 다시 그런 대속과 같은 그런 어려움을 내가 겪으면서 이 대속을 보존해야 되지 그 어려움을 겪지 안할라고 하면은 다시 옛사람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대속을 집어 던진 일이 되고 만다 그말이오.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대속으로 인하여서 보존할라 하니까 여러 가지 어려움이 올 때에 그 어려움을 내가 참고 견디지 안하고 그 어려움을 내가 면할라고 하면, 그 어려움을 면할라고 하면은 내나 그 어려움을 대속한 댓가를 도로 받았기 때문에 도로 대속이 본전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그 대속이 헛일된다 말이오. 이거는 어짤 수 없는 거라. 예수님도 어짤 수 없는 필연적인 고난이요, 우리가 이 대속을 보존하는 데도 필연적인 고난이요, 우리가 이 대속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데에도 필연적인 고난입니다. 안 하고도 될 수 있는 게 아니라 안 하고는 할 수 있는 길이 없어.
이러기 때문에, 내 증인이 되었다고 하는 이 말씀은 유언으로 하신 말씀인데 예수님의 증인되어 달라는 것은 이것을 가리켜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 복음을 전하는 데는, 이 복음을 전하는 데는 예수님이 어떻게 해서 세 가지 하나님의 진노를 푼 것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세 가지ㅡ세 가지 진노 푼 것 하나, 율법을 완성한 것 하나, 아버지와 화친한 것 하나ㅡ이 세 가지를 나에게 베풀어 주시기 위해서 어떤 그 어려움으로 나에게 댓가를 내시고 이 구원의 공로를 베풀어 주신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 대속을 보수하면서 이렇게 보수하는 것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를 하고 이 대속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므로 증거를 하는 그것이 우리의 전도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전도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전도입니다.
이렇게 할 때에, 이렇게 할 때에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얻고’ 권능을 얻는 것이 이 권능 얻어 가지고서 이 권능 가져 가지고 곧 세 가지, 세 가지가 뭣 만들어 냈는데?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의 그 모든 순위, 모든 방식, 그 모든 요소 그것 만들어 냈는데 그것으로서 다른 사람에게 이 복음을 전할 때에 그 만드신 이가 성령의 권능이 만들었고 그것을 전할 때에 성령의 권능이 나의 전하는 전함을 통해 가지고서 그 사람에게 건너가 가지고서 그 사람에게 성령의 권능이 건너가 가지고 그 사람을 중생시키고, 세례 주고, 그 사람을 또 권능 있게 만들어 가지고서, 일천 척을 흘러가니까 이 발꿈치에 올라오고 일천 척을 흐르니까 무릎에 오르고 일천 척을 흐르니까 허리에 오르고 일천 척을 흐르니까 두부렁이 뜬다고 상징해서 말씀하신 거와같이 가면 갈수록 땅끝까지 퍼져서 이렇게 해 가지고서 예수님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것이 예수님의 증인되는 유일한 방편입니다. 이외에는 다른 방편이 없습니다.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성령의 능력이 아니면 못 합니다. 그 방편은 예수님이 나를 대속하신 고 방편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방편 외에는 전부가 다 그것은 인본의 방편이지 딴 방편입니다. 예수님의 고 방편 그 권능, 그 방편, 그 공로, 그 권능 이것으로서만 사람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했을 때에 권능 오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모형이 됐습니다. 예수님의 형상이 됐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말씀하신 대로 나를 본 자는 예수님을 봤거늘 할 만치 사도들은 예수님의 모형의 사람들이 됐습니다.
그럴 때에 성령이 와서 역사하시니까 거기에는 다른 아무것 없었고 예수님은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해 가지고서 우리에게 어떤 걸 주었다 하는 것을 그들이 그대로 보수하고 그대로 전할 때에 그때에 사람들의 나타난 것은 미쳤다고 할 만치 구불면서 애통하는 회개가 나왔습니다.
애통의 회개가 나왔고 믿음의 담대한 욕망이 나와서 그렇게 예루살렘에 심한 박해가 있었지마는서도, 박해는 물러가지 안하고 그대로 있었지마는서도 사람들이 변화돼서 박해가 박해되는 사람은 죽어 버리고 박해가 유익이 되고 박해가 양식이 되고 박해가 한없는 기쁨이 되고 박해가 한없는 영광과 승리가 되어지는 사람으로 변화되고 마니까, 밥이 오면은 죽는 사람은 죽어 버렸고 밥이 오면 먹어서 양식으로 삼는 사람으로 변화돼 버렸기 때문에 살찌는 사람 됐습니다.
그래서, 그날에 회개하고 세례 받은 수가 삼천이나 이르렀습니다.
이래서,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에 이 복음에 성과가 있느냐 없느냐? 성과가 이루어지는 표시는, 전도가 된 표시는 회개입니다. 회개입니다. 내가 전해도 ‘나와 보라면 교회 나가 보지요’ 해도 그 사람에게 속에, 보이는 표시까지 그렇게 막대한 회개는 없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무엇인가 ‘이것 새것이 뭐 왔다.
이거 좀 뉘우쳐서 무엇인가 내가 고칠 바가 있고, 무엇인가 내가 잘못된 바가 있다.’ 하는 회개가 그 속에서 시발돼야 되는 것입니다. 시발돼야 이것이 알맹이지 그게 아니면 다 쭉덩이고 다 거짓부리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이 생활이 곧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는 예수님의 이 전도 방편, 우리를 구출 방편, 구출의 공로, 구출의 공로요 구출의 방편이요 전도 방편인데 이것은 필연적인 대속입니다. 곧 댓가를 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다른 사람을 구원할 때에는 이 대속의 댓가를 내야 되지 다른 웅변이나 열변이나 아무것 가지고도 되는 것 아닙니다. 댓가를 내야 됩니다.
예수님의 댓가 내서 나를 구원했는데 내가 이것을 댓가 냄으로 댓가 가지고 구원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이 댓가 낸 이 댓가를 내가 댓가로 전달돼야 전달되지 댓가 아니고 딴것으로는 전달되는 것 아닙니다. 언변으로나 전달되는 것 절대 아닙니다. 이것 댓가로라야 전달이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는 피로 세운다 그렇게 하는 말 있습니다. 제가 교회를 뭐 개척 교회를 한다고 해도 얼렁뚱땅으로 무슨 뭐 수단이나 방법이나 뭐 기만이나 이런 뭐 호화로움이나 이런 것 가지고 세운 교회는 절대 그 교회가 교회 아닙니다. 교회는 꼭 피로 세워야 됩니다. 피로 세워야 된다 말은 고난과 희생으로 세워야 된다 말입니다. 생명을 기울여 세워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개척 교회 하나하고 나면은 쫙 늙어집니다. 제가 개척 교회 하면서 늙지 안하고 자기가 그대로 싱싱하고 개척 교회가 되려는 것은 그거는 다 악마의 마귀의 허영이요 허욕이지 그거는 절대 안 되는 것입니다. 벌써 교회 하나 세웠으면 늙습니다.
그만치, 암만 교회를 개척 교회 하나 하고 둘 해도 교회가 안 됐으면 저는 그 교회로 말미암아 생명이 거게 들어가지 안했습니다. 늙지 안했습니다. 한 교회라도 늙고 거게서 자기 생명이 기울어지고 생명이 희생되어졌으면 된 것만치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어려운 증인노릇을 우리가 어떻게 할 건가? 이렇게 어려운 증인노릇을 우리가 어떻게 할 건가? 요한복음 15장 11절에 보면은, 11절에,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가 아버지 계명 지켜서 아버지 뜻 이룬 거와같이 네가 내 계명 지키면 내 뜻이 이루어지는데 내가 아버지 계명 지키므로 아버지 사랑이 완성됐고 너희들이 내 계명 지키면 내 사랑이 너희들에게 완성이 되겠으니까 하라 말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이 대속을 보존할려고 우는 그 울음 속에서 웃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을 내가 보존할라고 첩첩의 감옥 속에 갇히는 데에서 그 속에서 자유가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을 인해서 고문과 고형을 당하는 그 고문과 고형 속에 한없는 평강과 기쁨이 나오는 것이 이것이 기독자의 신비한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말하기를 많은 고난보다 내게 오는 위로는 넘쳐서 이기고 남음이 있다. 하루 종일 잡아 죽일 짐승같이 헤아림을 받았으나 오히려 이기고 남음이 있다. 이제 것이나 장래 것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천사들이나 권세나 어떤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를 끊겠느냐, 고난이나 핍박이나 위험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그 무엇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를 끊을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은 그들이 다 기쁨이 넘쳤고, 후회된 사람 없었고, 권태나는 사람 없었고 이 길을 가는 사람마다, 주님의 대속을 보수하는 십자가, 대속을 형제에게 전하는 십자가 여게서만 기독자에게 기쁨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여게만 기독자의 기쁨은 있습니다. 딴 데는 없습니다.
돈으로 기쁜 기쁨은 기독자의 기쁨이 아닙니다. 감옥에서 갇혔다가 나옴으로 기쁜 그 기쁨은 기독자의 기쁨이 아닙니다. 나오면은 승리한 그 기쁨 가지고 기쁨이지 나옴으로써의 기쁨은 기독자의 기쁨은 아닌 것입니다. 권세를, 출세를, 취직을 어떻게 해서가 아니고 기독자의 기쁨은 아닌 것입니다. 권세를, 출세를, 취직을 어떻게 해서가 아니고 기독자의 기쁨은 다 십자가의 기쁨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길 걸어간 사람이 권태가 안 났습니다. 이 길 걸어간 사람이 후회가 없습니다. 이 길 걸어간 사람이 약화되지 안했습니다. 절대 약화되지 안했습니다. 이 길 걸어간 사람이 조그만치라도 나태나 방종해지지 안했습니다.
그 힘은 독수리처럼 올라가고 돋고 돋고 그 기쁨은 충만하고 평강과 쾌락은 충만했습니다.
이뿐만이 아니고, 베드로전서 4장에 보면 ‘너희들에게’ 4장 12절에, 불시험을, 불시험, 불 같은 시험, 공산주의가 이제 죽일라고 우겨 싸 가지고서 사형을 줄라고서 죽일라고 포위를 해 가지고서 잡을 때에 그런 것은 다 불시험이요, 잡아서 고문과 고형을 주는 것들은 다 불시험이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한 걸음 넘어가서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그리스도가 나 위해 고난당하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고난당하는 그 고난, 내가 이 구원을 보존하기 위한 고난, 이 구원을 모든 사람들에게 주기 위한 고난이기 때문에 영광스러운 존귀한 그리스도의 고난에 네 천한 것이 참여하게 된 것인 것을 알고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오늘 이렇게 이 어려움당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인데 그리스도가 영광으로 나타날 때에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 그 영광에 같이 참여하고, 그리스도가 존귀히 모든 피조물들에게 존대함을 받아서 이는 주라고 시인할 그때에 이 구원 안에 참여하는 자 만물에게 그런 시인의 존대를 받게 되는 이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14절에,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영광의 성령, 「곧 하나님의 영이」 하나님의 영이,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이라 말은 하나님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너희 위에 계심이라」 네 위에서 너를 통치하고 너를 그 나래로 덮어서 그 나래 은덕 아래에, 그 은총 아래에, 네가 그 권세 아래에 네가 그 슬하에 있는 것이라.
「위에 계심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어떻게 내가 이런 그리스도의 고난에 이 천한 죄인이 동참하게 됩니까? 이렇게 만물과 만 인간을 구원한 이 구원의 공로에 내가 어떻게 동참하게 됩니까? 네가 기뻐 영광을 주님에게 돌리고 감사를 돌리라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각오를 합시다. 우리는 낮아짐 없이 구원 보존도 못 하고 구원 전하지도 못합니다. 낮아짐 없이, 가난해짐 없이, 천해짐 없이, 억울함 없이, 멸시 없이, 빰 맞는 일 없이, 매 맞는 일 없이, 감옥에 갇히는 일 없이, 죽는 일 없이, 고난당하는 일 없이 아예 이 구원을 강직할라고도, 전할라고도 생각지 말아야 됩니다.
이렇게 전할 때에 참으로 기독자의 참된 행복은 그 속에서 용솟음 쳐서 올라옵니다. 이것이 얼마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요 영광이 된 것을 우리는 깨닫고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