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3 14:17
상식믿음, 산 믿음
본문 : 요한복음 11장 20절∼27절, 38절∼44절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
여게 22절을 보면 `그러나' 하는 말은 `주님이 여게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죽기는 죽었지만 그러나, 죽기는 죽었지만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지금이라도 기도하면 나사로가 살아날 것을 아나이다 하는 말입니다. 살아날 것을 아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예수님께서 그 말에 대해서 대답하시기를 `네 오라비가 죽었으나 다시 살리라' 이렇게 주님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기도하면, 예수님이 지금이라도 기도하면 `내 오라비가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기도하면 살아 날 것을 이 마르다가 믿는 것을`말합니다. 지금이라도 기도하면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이랬는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이러니까 그 마르다가 `아, 감사합니다.' 이라든지 그렇지 않으면 `예, 믿습니다.' 이라든지 해야 될 터인데 마르다가 말하기를 `마지막 날에야 살아나지만 지금은 살아나겠습니까? 마지막 날에는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하는 것으로서 마르다가 처음에는 믿었는데 이제 실제로 예수님께서 그 나사로에 대해서 살릴 것을 말씀하니까 믿지 안하고 부인했습니다.
믿는 사람 우리 믿음이 이렇게 헛된 믿음을 가지고 늘 주님을 기다리는 그런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상식의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상식 믿음.
상식적으로 제가 믿는 믿음을 가졌지 실지를 당하니까 그만 부인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내 오라비를 지금이라도 기도하면 살아날 줄 믿나이다'하는 그것은, 살아난다고 믿었으면 예수님께서 그래 다시 살아나리라 하면 `아 감사합니다.' 감사하고 기뻐해야 될 일인데 `마지막날에 살 줄을 내가 알지만 지금이야 살겠습니까'하는 건 부인하는 말이라 그말이오. 사람이 상식적으로 다 믿는 척 하고 이래 말도 하고 다 이렇게 하지만 그 실지를 딱 당해 버리면 부인해 버립니다. 실상을 당하면 부인하고 현실을 당하면 부인하는 것이 우리들의 상식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아무 소용없어. 스스로 속습니다. 제가 믿는 줄 아는데 실상을 당하면 믿는 것이 아니라 그말이오. 또 띄워 놓고. 공중에 띄워 놓고는 믿는 사람이지만 딱 고 현실을 딱 당면하니까 그만 자기는 믿지 안하고 부인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25절에 말씀하시기를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죽고 사는 것을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네가 믿느냐 이러니까, 이 말씀을 듣고 난 다음에는 27절에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인 줄 내가 믿나이다' `그러하외다' 이제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인데 죽은 자를 살리고 산 자를 또 죽지 않게 할 그런 능력이 있는 것을 네가 믿느냐' 이러니까 `예. 이제 그렇습니다. 믿습니다.' 이랬습니다.
나사로를 이제 네가 말한 대로 다시 살리겠다 이러니까 이것을 부인하고.
`살아날 줄 알기야 알지만 마지막날에 살아나지 지금이야 살아나겠습니까' 이렇게 부인을 했습니다. 처음에 뭐 할라고. 구하기는 뭐 할 라고 구했습니까? `살려 줄 줄 압니다' 이렇게 예수님에게 구했으면 예수님이 살려 준다 하면 감사할 일이지 제가 구해 놓고는 또 살려 준다 하니까 딱 부인해 버리고 만 그것이 마르다의 일차 신앙이었습니다.
부인하는 것을,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기 때문에 죽은 자도 살리고 산 자를 죽지 않게 하는 그런 능력을 가진 내인 것을 네가 믿느냐 이러니까 또 `예, 주님은 오실 메시야이기 때문에 그렇게 죽은 자도 살릴 것을 믿습니다. 또 죽지 않게 하실 것도 믿습니다. 생명이요 부활인 주님이신 것을 믿습니다.' `그러하외다' 하는 것은 또 긍정하는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니까 제가 말을 해 놓고, 제가 말을 해 놓고 예수님이 저 하는 말에 따라서 그래 살아난다 이러니까 또 부인을 했다가 부인하는 것을 예수님이 또 말씀을 하시니까 `그러하외다' 또 이제는 믿었습니다. 제 생각으로 나오는 그 믿음이 믿는 것 같지만 실상을 당하며 헛 일이고 또 예수님이 하시는 그 말씀을 들어서 받아야 또 새로 믿음이 생겨집니다.
그러면, 지금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하외다" 하는 것은 믿는다 말입니다. 27절에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이렇게 믿었다 그말이오.
믿지 안했습니까? 이제 오빠 나사로를 살려줄 것을 믿었다 그말이오. 믿었는데 그다음에는 39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돌을 옮겨 놓으라 말은. 거게는 무덤을 굴을 파 가지고 장례를 합니다. 부자들은 돌을 파서.
돌을 파서 돌 안에다가 집같이 파 가지고 돌을 넓게 파고 그 안에다가 관을, 널을, 널에다가 시체를 넣어 가지고 관을 이렇게 하나씩 둘씩 포개서 그렇게 장례하는 그런, 부자들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그렇게 여럿을 하지 안하고 하나씩 돌을 파 가지고 돌에다가 빼닫이 모양으로 이렇게 해서 파 가지고 거기다가 이래 빼닫이 모양으로 밀어 넣어서 이래 하는 것도 있습니다. 이 무덤은 부자가 해 놓은 무덤이기 때문에 굴을 파고 그 안에다가 시체를 넣고 돌로 딱 가리워서 막아 놓은 그런 무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돌을 옮겨 놓으라 하는 것은 예수님이 지금 살릴라고 이제 시작하는 것입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 이러니까 마르다가 있다가 말하기를 `죽은 지가 나흘인데, 지금 썩어서 벌써 냄새가 나고 있는데 돌을 옮겨 놓으면 어짭니까? 옮겨 놔야 소용 있습니까?' 또 이렇게 또 부인합니다. `지금 돌을 옮겨 놓으면, 벌써 썩어서 냄새가 나고 있는데 옮겨 놓아야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필요가 있습니까?' 이렇게 또 부인을 합니다. `썩은 냄새가 나나이다' 이러니까 또 예수님이 또 말씀하시기를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하지 안했느냐' 이러니까, `믿으면' 여기 간단하게 기록하기를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안했느냐' 이렇게만 기록했지만 성경에는 수많은 말을 간추려서 기록한 것을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네가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와서 역사 하시는 것을 모든 사람이 보고 `과연 하나님은 참 능치 못하심이 없으시구나' 이것도 알 것이고, 또 이렇게 지금 모든 믿는 이를 통해서, 믿는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것을 다른 사람들이 알기도 하고 하나님께 칭찬과 영광을 돌리게도 한다 이러니까 마르다가 이제는 돌을 옮겨 놓습니다.
돌을 옮겨 놓는 거는 그거는 마르다가 믿는 행위입니까 안 믿는 행위입니까? 처음에 '무덤을 해 놨는데 이 돌을 치울 필요가 뭐 있습니까. 지금 죽은 지가 나흘이 돼서 썩어서 냄새가 나는데?' 하는 그것은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부인했던 것입니다. 부인했다가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안했느냐' 하는 이 말씀을 듣고 난 다음에 이제 돌을 옮겨 놓는 것은 그것은 또 마르다가 믿는 믿음을 가지고 옮겨 놨던 것입니다. 그리니까 예수님께서. 다 옮겨 놓고 난 다음에 예수님이 나사로를 부를 때에 나사로가 베로 동인 채로 살아났습니다. 살아나니까 이제는 그 다음에 또 풀어서 걸어다니도록 풀어 줘라 이러니까 풀어 주니까 걸어다녔습니다.
풀어 주니까 걸어다니는 풀어 주는 것도 믿음이요, 돌을 옮겨 놓는 것도 믿음이요, 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는 말씀을 듣고 `옳소이다 그러하외다' 하는 것도 믿음이요. 또 `지금이라도 주님이 기도하시면 살아날 것을 믿나이다'하는 그것도 믿음입니다. 다 믿음이나, 믿음이나 지금이라도 기도하면 살아나겠다' 하는 그것도 믿음이나 그 믿음이 실제의, 예수님이 살아나리라 하는 그 실제와 현실을 끌어다 붙이니까 그 믿음은 그만 뚝 떨어져 버려서 불신이 되고 말았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하는 것은 그거 불신이라 말이오. 믿음이 아니라 그말이오. 믿음이, 그 믿음이 헛일입니다. 그런 믿음 가지고는 주님이 일을 하실 수가 없습니다. 아주 상식적으로, 현실을 당하지 안했을 때는 `내가 믿나이다' 하는 그 믿음 가지고는 소용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만일 공산주의가 와 가지고 예수 믿는다고 박해를 할 때 그 때에, 평소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내가 믿나이다 하나님의 주권 개별 섭리를 내가 믿나이다' 말을 해도, 그 사람이 주권 개별 섭리를 믿는다 말은 `주님은 크고 작은 모든 것을 홀로 주권하셔 가지고 당신의 뜻대로 이와 같이 하시는 것을 내가 믿나이다'하는 말입니다. 주님의 개별 섭리를 믿는 다면 그 믿음은 참 좋은 믿음인데, `내가 주님의 개별 섭리를 믿나이다 믿나이다' 이렇게 말했지만 공산주의가 독침을 가져 와 가지고 찌를라고 이렇게 할때에 그때에 이제 죽을까 두려워서 항복을 한다든지 신앙을 버린다든지 하는 그런 것은 주님의 주권을 믿는다고 했지만 믿는 믿음이 아니라 그말이오. 그런 믿음 가지고는 주님이 일을 하실 수가 없다 그말이오. 틀림없는 정확한 진실한 믿음이라야 그 믿음을 가지고 주님이 일할 수 가 있지 그런 믿음이 아니면 일 할 수가 없어.
주님의 주권 개별 섭리를 믿는다면 독침을 가지고 그 공산주의가 내게 달라드는 것도 주님이 주권하시는, 주님의 주권대로 주님이 그렇게 하셔서 그와 같이 하는 것이지 제 단독 행위는 하나도 없는 것을 믿어야 되겠고 또 그러면 사랑하는 주님이 자기에게 독침으로 그라니까 자기를 해하지 안할 것이라는 것도 믿어야 하겠고, 또 그것은 주님이 정말로 주를 믿느냐 안 믿 느냐 하는 것을 시험하는 것이라는 것도 자기가 알아야 되겠으니까 그러면 뭐 두 말 할 것도 없이 용기를 가지고 나서지 거기서 주저하고 그렇게 공포와 비겁에 싸일 리가 없다 그말이오.
오늘 아침에 말씀하는 것은 우리가 믿는 줄 아나 그 믿음이 다 거짓부리고 헛되어서 실상에 가 가지고는 아무 효력이 없는 그런 믿음을 가지는 것을 이제 회개하라고 지금 말하는 것입니다. 대개 세상에서 유력하고 유식 한 사람들이 다 이믿음을 가졌습니다. 그 사람은 뭐 상식적으로 제가 또 말하면 말도 잘합니다.
그러나 실지를 딱 당하면 헛일이라 그말이오.
왜정 말년에 유식한 박사 쳐 놓고는, 박사, 뭐 신학 박사니 하는 박사 쳐 놓고는 신사 참배 이긴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다 얼마나 논리로야 잘 믿는 척 하고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까? 이 마르다와 같은 사람이라. 실지를 딱 당하니까 하나님의 권능도 믿지 안해. 실지를 당하니까 하나님의 역사도 믿지 안해. 신학 박사 중에 신사 참배 안 한 사람이 하나 있는데, 한 사람이 있는데 우리 한국에서는, 한 사람이 있어도 그거는 신사 참배 한 것이지 안 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냐 하면 ○○○박사가 신사 참배를 안 했는데 안 한 거는 일본으로 망명을 했습니다. 아마 신사 참배 때문에 이거 안 되겠다 싶으니까 그사람은 공부를 많이 해서, 그때는 일본 같은 데도 갈라 하면 약간의 증명만 있으면 갈 때이니까 증명을 내가지고 일본으로 갔다 말이오. 일본으로 갔을 때 그 사람이 예수 믿는 표시가 있었더라면 그 말이 날 터이니까 가지도 안했을 터인데 예수 믿는 표시가 없다 말이오. 도일 증명. 일본 나라에 들어가는 도일 증명에는 그런 표시가 없으니까 살며시 해 가지고 예수 안 믿는 척 하고 가 가지고 일본을 갔다 말이오. 그때 만일 `네가 믿나 예수 믿나, 네 종교가 뭐꼬?' 하면 그때 예수교라고 하면 딱 붙들어 `너 신사 참배 안했지?' `아. 신사 참배 저는 안 합니다' 했든지 그리 안 하면, 피해 가지고 도망하는 그 길이면 `아. 신사 참배 했습니다.' 하는지 그래 안 하면 `하겠습니다.'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예수 믿느냐 하면 머물머물 그래 가지고 넘겼을 것이라 그말이오. 피해서 도망가는 사람이 닥치면 거짓말을 하든지 그리 안 하면 뭣인가, 회피를 할 것 아니겠습니까? 또 일본서 있다가 차차차차 거석해 가지고 그러니까 `아 여기도 또 안 되겠다' 해 가지고 또 만주로 또 도망을 갔다 말이오. 그래 가지고 신사 참배를 피했지, 신사 참배를 자기가 안 하겠다고 일본 경찰들에게 대항해 가지고 부인하고 그렇게 나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전부 신학 박사들 전부가, 다 신사 참배에 다 꺼꾸러졌습니다. 또 그러고 대학을 맡은 목사 쳐 놓고 이긴 사람이 내가 알기에는 없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자기는 유식한 지식을 가지고 믿는 그 믿음이 상식 믿음이지 실상 믿음이 아니요 생명 있는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조심을 해야 되지, 제가 믿는 것은 다른 사람보다 말로도 잘하고 또 이렇게 논리도 잘하고 이러니까 정말 믿는 줄 알지만 그게 아니라 그거요.
그렇게 실상을 당하니까 부정했지. 부정하다가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인데 네가 이것을 믿느냐' 이러니까 그때사 또 믿음을 가지고 `예 그러하외다 내가 그런 것을 믿습니다.' 또 주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으니까 또 믿음이 생겨서 또 그렇다고 또 이제 믿음을 가졌다 말이오. 가졌는데 또 주님이 돌을 옮겨 놓으라고, 그러면, 현재의 현실을 딱 당했다 말이오. 현실과 그 실상, 현실과 실상을 딱 당해서 이제는 돌을 옮겨 놓으면 그 속에 시체가 들었는데, 돌을 옮겨 놓으라 하니까 또 믿지 안하고 또 부인했습니다. `죽은 지가 나흘이 됐는데, 썩어서 냄새가 나는데 옮겨놔서 무 슨 일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부인을 했습니다.
부인을 하니까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게 말하기를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안했느냐 이러니까 그때사 이제 돌을 옮겨 놓는다 그말이오.
우리는 여기서 깨달을 것이 뭣인고 하니, 자기가 현실을 닥치지 아니하고, 그 실상을 당하지 안하고, 실상에 대한 믿음 현실에 대한 믿음이 아니면 다 죽은 믿음이요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제가 믿겠다고 결심을 하고 뭐 물을 흘리고 금식을 하고 아무리 믿겠다고 뭐 맹세를 하고 떠들고 암만 떠들어 봤자 현실에 믿는 믿음이 아니면 소용이 없고 그 실상에 믿는 믿음이 아니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시험을 해서 매일 매일 현실이라 하는 걸 닥치는 것은 그냥 닥치는 뭐. 현실 닥치니까 또 자고 나서 또 현실 닥치니까 제 마음대로 그 현실을, `이 현실에는 내가 돈을 벌어 볼까 뭘 해 볼까 무슨 사건 해볼 까' 그것이 뭐이냐? 그 현실을 지금 제 생각대로 이 현실을 어떻게 요리할까 어떻게 이용할까 하는 것이라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늘 말하기를 `현실은 주님이 만들어 주셨다. 아무도 만든 게 없다.' 현실이 만들어지는 데는 사람도 들었고 사건도 들었고 뭐 자연도 들었고 온갖 것이 들었습니다. 들었으니까 그게 들어서 현실을 만드는 줄 알지만 이제 그런 것들을 주 집합해 가지고 자기에게 그런 현실이 되게 하신 이는 주님이시라 말이오. 만물을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주님은 지금도 개미도 복종케 하시고 만물을 다 복종케 하시고 마귀도 복종케 하시고. 전부 주님에게는 다 만물이다 복종합니다. 이래서 빌립보 3장에 말씀하시기를. 21절에 말씀하시기를 만물을 복종케 하 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시고 우리의 낮은 몸을 당신의 영화로운 몸과 같이 다시 살리리라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이걸 다 믿어야 됩니다. 이렇게 현실을 당했을 때에 돌을 옮겨 놓으라 하니까 그때에 부인했다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안했느냐' 하나님의 영광 본다 말은 믿기만 믿으면 `아, 과연 하나님이로구나. 하나님은 이러한 하나님이로구나' 그러기에,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것도 믿는 사람의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은 선하다 하는 것도 믿는 사람의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것도 믿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지극히 공변된 하나님이라 하는 것도 믿는 사람의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사람들이 벌벌 떠는 것도 믿는 사람의 믿음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지 믿음이 아니면 안 나타난다 말이오.
그러면, 평소에 자기가 멀리 두고 하나님은 두려워하는 하나님이라,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라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은 그것은 그저 그 도리를 그 진리를, 하나님의 것을 지식적으로 전하는 것이오. 지식으로 전하는데 지식으로 전하는데 지식 속에 뭐로 전할 수가 있다고요? 지식으로 전하고 또 그다음에 몇 가지로 전한다 했어요? 몇 가지로? 주일학교 반사들이나 설교하는 사람이 몇 가지로 전해야 된다 했어요? 손 가락으로 가리켜 봐요. 일곱 가지도 말하고 여섯 가지도 밀하는데, 자, 그러면 한번 헤아려 봅시다.
자, 이제 지식으로 전하고. 또? 자기가 지식으로 전하는데 깨달음으로 전하고, 깨달음이라는 것은 거게 대해서 나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거게 대해서 자기와 관계를 연관을 시켜 가지고. 제가 증거하는 그 말씀과 저와 둘이 연관을 시키니까. 나는 이걸 고쳐야 되겠다든지, 나는 이것을 결심을 해야 되겠다든지, 이제는 내가 실행을 해야 되겠다든지, 과거에는 그랬지만 그 말씀 증거하는 말씀과 자기와의 관계를 가지고 깨달은 그것을 가리켜서 깨달음이라, 거기서 각오가 생겨지는 걸 가리켜 말합니다. 자 깨달음을 가지고, 또 뭐입니까? 예? 실감을 가지고. 또? 그라고 난 다음에는? 실감을 가지고. 실감을 가지면 또 뭐 하겠어요? 실감을 가지고 난 다음에는 양심의 감동을 가지고, 또? 예? 승리? 아 그러고 난 다 음에는 성령의 도움의 성령의 감동을 받고 또? 그라고 난 다음에는 지극히 큰 능력과 동행하는 동행을 가지고, 또? 그러면 그 다음에 성과를 거두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그라고 난 다음에는 그런 사람이 돼 버린다 말이오. 그런 행위가 되고 그런 사람이 되고 난 다음에, 그러니까 말만 전하는 사람, 깨달음을 같이 전하는 사람, 양심 행동을 전하는 사람, 영감 협동을 전하는 사람, 또 능력을 받아서 능력까지 같이 전하는 사람. 또 그렇게 자기가 실행을 했기 때문에 그 실행을 같이 전하는 사람, 또 그라고 난 다음에는 자기가 그와 같은 사람이 됐기 때문에 또 사람까지 전하는 사람 그것이 될라고 바울이 애를 썼지 입으로 가지고 전해서, 무슨 묘한 설교를 할까 그런 것을 바울이 생각지를 안했습니다. 그러기에, 지식의 오묘를 가질라고 하지를 안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증거하는 것도 다 외식이, 얼마나 외식 이 있는지 모릅니다. 이런 외식을 자꾸 벗어 버려야 되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이 자기가 실지로 살아 보면. 살아 보면 예수 믿는 데에 영생이 확실히 있다는 것이 자기가 믿어지게 됩니다. `아, 이러니까 영생을 하지. 영생할 수밖에 없지. 이거는 절대 안 죽는다.
죽일 세력이 없다. 죽을 수가 없다'하는 것을 자기가 실지로 체험하고 알게 됩니다. 껍데기로 믿기 때문에 그런 것이 다 믿어지지를 아니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말씀에서 우리가 하나 첫째 생각할 것은 뭐이냐 하면 믿음이라 하는 것은 그 현실. 그 현실을 당한 거기서 믿는 믿음이 믿음이지 현실을 당한 그 현실에 대해서 믿지 안하는 그 믿음은 소용이 없습니다. 현실에 대해서 믿지 않는 거, 암만 시간을. 현실이라 말은 시간과 뭐 다른 걸 말하는 것인데, 시간을 말하면 현재에 믿는 믿음. 지금 이 시간 믿는 믿음이 믿음이지, 많이 믿기야 믿었지만 그 시간 딱 당하니까 그만 믿지 안하고 믿음을 가지지 못하는 그런 믿음은 다 죽은 믿음이요 다 상식 믿음이요 다 외식 믿음이요 실상이 없는 거짓 믿음이라 그말이오.
제가 하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으로만 우리가 살아야 되지, 축복 외에 다른 조건 좋은 것보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모든 것이 되어져야 된다 이 말을 암만 해도 자기 현재에 그것이 딱 그런 당면을 하니까 `아, 축복보다 이런 조건이 좋아야 되지' 하나님 말씀을 지킬라 하면 좋은 조건을 다 버리게 될 때에 롯이, 축복보다 조건이 큰 줄 아는 그 사람은, 실상의 그 현재를 닥치니까 그래 여기기 때문에 그 사람은 그래 갔고, 아브라함은 그 믿는 것이 현재를 당했거나 실상을 당했거나 요동치 안 했기 때문에 그 사람은 그대로 행했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은 현재에 관한 믿음이 참 믿음이지 현재에 믿는 그 믿음이 믿음이지 현재를 떠난 믿음은 아무 소용없습니다. 뭐 그 사람이 믿음 박사라 할지라도, 믿음에 대해서 어떻게 설교를 잘한다 할지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 자기에게 당한, 자기에게 당한 현재에 당했을 때에 그 때 믿어야 합니다. 그때 믿은 믿음이 산 믿음이오. 또 어떤 사람이든지 물건이든지 사건이든지 실상, 그 실상을 당한 그 실상에 대해서 자기가 믿음으로 행하고 그 믿음이라야 되는 것이지 실상에 대해서 믿음으로 안 하고 공중에 띄워 놓고는 믿는 척 하다가서 실상이 딱 닥치니까 그만 믿지 못하고 날뛰는 그런 것은 믿음이 아니라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자기가 암만 지금은, 앞으로 불이 온다 할지라도 앞으로 어떤 물질 문제가 온다 할지라도, 인인 관계의 문제가 나온다 할지 라도 어떻게 견디지 못하는 억울함이 온다 할지라도, 어떻게 분함이 온다 할지라도, 어떻게 유혹이 올지라도 이렇게 이런 것을 가져야 될 터인데. 뭐 보며 이거 참 너무 허무합니다. 너무 허무해. 여러분들의 신앙이 너무 허무합니다. 실상을 닥쳐 놓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
마귀라 놈이 요래 꼬우면 요래 넘어가고 조래 보우면 조래 넘어가고 그 까짓 게, 마귀란 놈이 와 가지고 아무리 거짓말이라도 제게 유익하도록 에덴 동산에서 마귀가 하와를 어떻게 꼬았습니까? 하와 꼬운 것이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들에게 모든 것을 먹지 알라 하더냐' 이 `참으로' 하는 그 말은 벌써 그걸 아, 하나님이 너희들에게 참으로, 이럴 수가 없는데 하나님이 너희들에게 먹지 말라 하더냐' 이거는 참말로 통분할 일이요 이거는 절대 이럴 수가 없는 일인데 하나님이 너희에게 무례한 일을 했다 하는 그런 전제를 딱, 감정을 일으키기 위해서 `참으로' 이랬다 말이오. 이러면서 너희들이 이거 먹으면 아는 것이, 선악을 아는 것이 하나님같이 될 줄 알고 그런 것 아니가?' 이러니까 그 말이 하와를 위하는 거 같은 말이오 위하는 것 같지 안한 말이오? 그 위하는 말이라 말이오? 네가, 이거 먹지 말라 하지? 이것만 먹으면 하나님같이 될 줄 알고 그래 먹지 말라 하는 것 아니가?' 그러니까. 그 하와를 동정하고 하와의 편이 되고 하와를 위하는 말을 하지 않했습니까? 마귀란 놈은 인간을 죽일 때에 언제든지 그래 죽입니다.
그래 죽여요.
떡 말하면 얼토당토 안한 일이라도, 저 옛날 무슨 그 사람에게 말한 걸 그걸 딱 달아 가지고 `아무 이 먼저 번에 너한테 이런 말 하지? 그 말 한 그게 어디 그럴 수가 있나, 어디? 그 말하는 것이 슬그머니, 예를 들어 가지고 백 목사를 말하면 이 사람에게 가 가지고 `백 목사가 너한테 이리 이리 말하지 않더냐? 어디 그럴 수가 있느냐' 떡 그랄 때에 그 사람이 듣고 `글쎄' 하면 벌써 귀신 들어갔다 그말이오. 귀신 들어가 가지고 귀신 들어가 가지고, 그라고 난 다음에, 귀신 들어갔으니까 귀신하고 합작입니다. 그 사람은 죽었고 벌써, 귀신이 들어가 가지고 지금 주인이 돼 버렸다 그말이오. 그라고 난 다음에 이렇고 저렇고 이렇고 저렇고 말해 가지고 말하면 그 사람이 그만 백 목사에게 분함도 가지고 반대도 가지고 은혜도 받지 못하는 그런 사람 만들어. 그게. 네가 녀를 죽였다. 그 사람이 너를 죽이는. 너를 죽이는, 살인인 줄 알아야지, 살인인 줄 알아야. 그게 원수인 줄 알아야 되지. 그러니까, 아, 이 사람은 내 편이다. `그래. 목사님은 그렇지! 이래 가지고 마귀에게 놀림거리가 돼 가지 그 죽는 인간들이 여게 얼마나 앉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애. 네가 나를 넘어트릴라고 하는구나. 목사님이 나한테 잘못 말했으면. 알지 못하고 말했으면, 그거 알지 못하고 말했으니까 내야 뭐 상관할 게 뭐 있나? 모르고 하는 말을 네가 돌리지 안했으면 거기 대해서 내가 말할 게 뭐있나? 또 알고, 잘못한 게 있어서 말했으면 내가 고치며 피는 것이지 그럴 게 뭐 있나? 왜 하나님의 종을 네가 훼방을 하려느냐? 네가 하나님의 종에게 날 은혜 받지 못하도록 그 사이를 이간 붙여 끊을라고 하지? 사탄아. 물러가라!' 요래 버리면 그놈이 빠짝 죽어 버리는데, 고기 귀신을 거게 딱 쫓아지고 그 사람 살고 나 살고 다 사는 것인데, 그래 가지고. 이제 그러니까 그래 가지고 삐쭉거려서 제게 붙여 가지고. 제게 붙여 가지고 제게 유익하도록, 절 위하는 것으로, 절 동정하는 것으로 제 편으로 붙어 가지고 말 한 마디 만 하면 획 넘어 가 버립니다. 그까짓 게 무슨 믿음이야? 그거 믿음 아니야. 그런 믿음 가지고는 생명도 못 내놓고 그런 믿음 가지고는 불탈때 불 안 타지 않습니다. 그런 믿음만 가지고는 영생 이루는 것은 한 내끼도 없습니다.
이러니까, 제까짓 거야, 마귀란 놈이 제까짓 게 암만 해도, 제게 속한 거 뭐 감정될 거 서로 섭섭할 거 그런 걸 꾸밉니다. 그런 말을 달아 가지고. `야, 네게 대해서 이렇게 말하더라 이렇게 말하더라, 말도 안 한 것도 `이렇게 말하더라'하면 '그래?' '그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이렇고 이렇고 이래서 그런 거 아닌가?' '그래 그래 그래 그래' 이렇게 이래 가지고 그래 놓고 난 다음에 이제 그 사람이 뒤에 가서는 그 사람에게, 예를 들어 백 목사라면 백 목사에게 가 가지고 `어디 나한테 왜? 이런, 말 했다 하는데 이럴 수가 있습니까? 혹 그 말 할지 모른다 말이오. 그 말 할지 모르니까 얼른 또 수습을 해야 됩니다.
그래 놓고 난 다음에 얼른 이제 나한테 옵니다. 나한테 와 가지고 `아, 그 사람이 내가 가니까 이렇고 이렇고 이렇고 이렇고 이렇게 말합디다.' 제가 말한 것이 내게 벌써 그 사람이 와서 전할 상 바르니까 폭로될 상 바르니까 벌써 미리 와서 앞질러 말 한다 말이오. 이것을 다 마귀의 수단법을 아는 사람은 압니다. 딱와서 보고 말할 때에 `아, 요거는 사탄이로구나. 요게 요리 요리 말하고 요거 그 사람에게 가 가지고 요펀 말을 했구나' 제가 무슨 말을 한다 해도 말하는 대로 듣지 안하고 거게 대해서 이래 전하러 온 진상을 압니다. 이래서, 거짓말 참말 어떤 말이 와도 나는 그것을 바로 깨달아져야 그게 성신의 사람이고 그 사람이 속지 안하지 그렇지 않으면, 뭐 되겠습니까? 그렇게, 사람이 그렇게 말을 들을 때에 옳은 말을 분별하지 못하고 어두워지고 또 자기에게 구원 이룰 것을 구원을 손해보고 하는 그 모든 것은 사람들이 어두워져 그런데. 사람들이 어두워져 그런데. 자, 어두움이 어디 가리워 가지고 어두운 것인지 아는 사람 손 한번 들어 보이소. 죄에 가리워서? 그거 육십 점이나 됐을란지 그거는 합격 아니라. 또 저 뒤에 누가 아는 사람 손 들어 봐. 예. 여기 백 점 했어. 거게는? 거게도 백 점 했어. 이런데, 박사들은 몰라요. 박사들은 몰라.
그거 그거 알면 큰일 날라고? 자기에게 가리워져 그래, 자기에게. 자기에게 그래 돼.
자기 위주 자기 중심은 전부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그걸 알고 철통같이 느끼고 막 가슴을 치고 평생 소원이 돼도 그놈을 떼 버리기 가 어려운데, 죽는 날까지 자기를 위해서. 자기 위하면 좋아하고 자기에게 조그매 걸리면 막 사자같이 덤비는 그것이 제가 구원을 이루어? 구원에서는 천리 만 리 거리가 멉니다. 자기가 원수요. 여러분들이 살펴 보십시오. 자기 좋은 대로, 자기 좋아하는 대로 한 일의 결과가 뭐이며, 자기 `소원대로 한 결과가 뭐이며. 자기 성질대로 한 결과가 뭐이며. 자기의 욕심대로 한 결과가 뭐이며. 자기의 주관대로 한 결과가 뭐이며, 자기 위주로 한 결과가 뭐이며, 자기 중심으로 한 결과가 뭐이며, 자기 좋게 한 결과가 뭐이며. 이 결과가 뭐인가? 그 결과가 뭐입니까? 그 결과는 한 말로 말하면 자살입니다. 한 말로 말하면 자살. 전부 다 자기 죽는 그 생활 외에는 아무것도 거게 섞인 게 없습니다.
왜? 그놈이 자기가 아니라. 자기 아닌 원수라. 참 자기를 죽인 원수라. 자기 아닌 것이, 자기를 죽인 원수가 자기인 것처럼 과장을 해 가지고 자기에게 나타난 자이니 그자가 뭘로 된 것들입니까? 몇 가지로 된 것입니까?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소. 몇 가지로 됐습니까? 이거 바보들이라 모두. 손가락으로 들어야지. 그러면 새벽 기도 뭐 하러 나와? 뻐뜩 들어 봐요, 뻐뜩 들어 봐. 이제 틀렸다 하면 어짤꼬 싶어서 들어도 요래 들어. 여게 숨겨 가지고. 들면 만일 일어서서 말하라 하면 안 될 상바르니까 알았나 모르나 요래, 손 안 들었냐 하면 요래 살며시 들고 요래 버리면 인제 알도록, 그것도 자기를 둘러싸고 자기를 위해서 자기를 이렇게 둘러 싸는, 자기를 숨겨 보호할라 하는 그거라. 그걸 다 그런 걸 자꾸 죽여야 돼요.
그러기 때문에, 베드로같이 솔직한 사람이 구원 얻습니다. 요렇게 조렇게 꾀로 가지고 요래 조래 해서 자기를 첩첩 보자기로 싸 놓고 요래 싸 가지고 이렇게 가루고 조마게 가루고 덮어 누르는 자고 자 아주 세상에서는 도덕 행위는 다른 사람이 거석할 게 없습니다. 조심조심 하기 때문에 그렇지만 속에는 옛사람 그놈이 들어서, 그 속에 들어서 자기의 평생 생활을 옛사람 자기 중심으로 자기 위주로, 자기에게 말만 하면 막 뽀르르 그러는데 누가 말해 주겠습니까? 처음에는 몇 번 말해 주지만 뽀르르 하는 그자에게 지옥을 가든지 말든지 냅두지 뭐 그런자에게 말해 주겠소? 개에게 진주를 던지면 진주는 밟아 버리고 와서 물 터인데 진주를 던질 필요가 있습니까? 자기에게 말하는 허물을 말할 때에 듣기 싫어하는 그자에게 누가 말해 줍니까? 개에게 진주 던지면 진주는 밟고 와서 물라고 달라드는 그자에게 진주 같은 옳은 말을 누가 해줍니까? 자기의 잘못한 걸 말해 줍니까? 이러기 때문에 남의 말을 듣지 못하는 자 그런 자, 그런 자는 희망이 없습니다. 남의 말을 다른 사람이. 어떤 지위에 올라가면 다른 사람이 말 안 해 줍니다. 말 안 해 주는 것은, 이제. 그때는 자기가 자기의 모든 것을 다른 사람이 아는 것보다도 더 잘 알 수 있는 것으로서 그런 사람으로 변화 돼야 되지 자기가 자기의 것을 연구해서 남이 암만 알아 봤자 남이 아는 것이 열 가지라면 자기 아는 것은 한 백 가지나 되어지니까 그 십 배나 자기가 자기를 알 수 있는 단점을 알 수 있는 그 사람이 되어지면 그 사람은 구원 얻지만 어느 정도까지 껍데기는 올라가면서 자기가 자기를 반성해 찾지 못하고 다른 사람 말하는 것은 말만 하면 호랑이같이 달라들고 이러니까 그자에게 말할 수가 없어. 말을 할 수가 없어.
말할 수가 없으니까 이게 살까 해서 간접으로 이래 보내 봅니다. 연락을 해 봅니다. 슬그머니 그래 간접적인 소식을 들어 보면 해 보면 조금 이제 희망이 있으면 차차차차 옳은 것은 말해 줄라고 이라는데 옳은 것을 말 해 줄라고 조금 접선해 볼라 하니까 확 달라듭니다. `아이구 아직 안됐다. 하나님께 맡겨 둬야 되겠다. 하나님께 맡겨 둬야 되고 이거는 세월에게 맡겨 둬야 되겠다' 그러니까, 그런 자에게 대해서는 천 년이 하루 같다 그말이오. 세월은 자꾸 지나가는데, 제까짓 게 암만 해도 지금 점점 쭈굴쭈굴해지고 머리가 희끗희끗해지고 자꾸 이제 죽을 날이 가까워지는데 도무지 고쳐 줄 그런 기회는 가지지 못하니까, 참 세월은 지나가는 데 천 년이 하루 같아. 그런 자에게 대해서는.
이러니까, 어디 가리워져 가지고 인간이 어두워지느냐? 어두워지는 것은 전부 자기에게 가리워져 가지고 어두워집니다. 자기라니? 옛사람 자기, 옛사람 자기가 뭐인데 전부 자기 옳은 것을 다 가리워서 멸망하게 하는가? 세 가지. 악령, 악령은 자기 중심의 귀신에게 걸렸다 그말이오. 또 악성은 거게, 악령의 미혹을 받아 가지고 제가 하나님 중심으로 살지 안하고 자기 중심으로 사는 자가 된 그것을 가리켜서 악성이라 말합니다. 악습이라 말은 하나님 중심으로도 이웃을 중심으로도 하지 안하고 제 중심으로만 있는 힘 전심 전력 기울여 가지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안하고 살아놓은 그 행위가 한 번 두 번 연습 연습하고, 익힐 습(習)자. 그 일을 또 익히고 익히고 해 가지고 된 그것이, 악은 자기 중심인데 자기 중심의 것을 익히고 익혀 가지고 된 그것을 가리켜서 악습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악령 악성 악습 이 셋이 옛사람이라 하는 것을 나는, 내가 연구해서 알지를 안했어. 연구해 가지고는 성경 암만봐도 알 수가 없어.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모르지. 주님이 나에게 가르쳐 줬어. 옛사람은 악령 악성 악습으로 된 게 옛사람이라 하는 것을 주님이 나에게 가르쳐 줘서 내가 알았어. 설교할 때, 대구에서 설교할 때에 그것을 주님이 그래 가르쳐 줘서 그렇게 말을 해 놓고 이게 맞나 안 맞나, 말이 툭 튀어나와 말은 했는데 맞나 안 맞나 뒤에 조사해 보니까 과연 맞아. 이래서, 옛사람이 뭣으로 된 것인가 하는 걸 알고 보면 승지만 그것이 조직 신학에 안 나와 있습니다. 없어. 여러분들이 알아요.
내가 이래 말하는 거는 내게 대해서는 미친 소리요, 다른 사람에게 욕하게 하는 소리입니다. `아따, 또 자기 자랑한다' 자기 자랑은 미친 소리요 다른 사람에게 시기 질투 있고 훼방하고 미움 당하는데, 그 말 하는 게 백해 무익인데 할 필요가 뭐이요? 여러분들 때문에 한다 그말이오. 설교를 시시하이 듣지, 요새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이래 말하니까 듣기가 싫어 , 듣기가 싫은 그것은 네가 옛사람으로 됐기 때문에 듣기 싫다. 듣기 싫은 것은 예수님의 재림에. 재림에 소망을 가지지 안했기 때문에 듣기 싫다. 예수님의 재림이 오면 네가 불타고 망할 자인 것을 네가 스스로 증명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지만 어두워서 모른다 말이오. 이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설교를 하니까 듣기가 싫어서 오후에는 사람이 모자라.
사람이 없어.
또, 이래 가지고, 이걸, 그것을 한번 다져야만 구원이 되어지기 때문에 이래 놓고 `믿사옵나이까'이러니까 `믿사옵나이다'이래 말하면 `나 같은 점잖은 사람이 나 같은 훌륭한 사람이. 아, 우리를 우리도 다 인생관이 결정된 다 참될만한 사람인데. 당당한 한 개인의 인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데 무슨 국민학교 일학년을 가르치나, 우리를 일 학년으로 보나 국민학교 학생으로 보나' 국민학교 일학년은 가르치는데 알아듣기를 더 많이 알아듣지. 그보다도 더 못 알아들으니까. 교만이 속에 들어 가지고 이제, 말하라 하면 말 안 합니다.
`믿사옵니까' `믿사옵니다.' 하면 추접하고 열쩍게 `믿사옵니다?' 이제 아이가 돼야 돼. 아이가 돼야 천국 얻지, 그리 안 하면, 천국 얻지 못해요. 그 속에 교만이 들어서 다 그래요.
그라고. 이래 `손 드십시오.' 하면 손은 더 안 듭니다. `손 드십시오.?' 언제 손 들라 한다고 여기 신고함에 어떤 사람이 써넣어 놨어. 손 들라 그래 해 놓고 손을 안 드니까 손 안 든다고 야단을 치고 그러니까 `너무 주관적이다' 이래. 그러면 그 아는 걸 손 들어라 하는 것이 진리가 진리 아니가? 성경이가 성경 아니가? 그것부터 네가 말해 라. 편지했는데 그 사람이 죽은 사람이라. 이 서부교인인데 아마 신문 기자 같아. 신문 기자 같은데 제 무슨 주소나 그런 것을 분명히 해 놓지 안하고 그래 놨어. 그거 죽은 사람이라, 제가. 떡 말하기를, 그때 내가 설교하기를 히브리서 11장 1 절을 설교했던 모양이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그 성경 말씀 해석은 참 내가 평생 듣지 못하는 말씀을 들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 놓고 난 다음에 `이렇게 하지만 손 드십시오. 뭐 이래 하고 안 드니까 또 야단을 치고 하는 그거는 너무 주관적이고 너무 강권적이다' 그러니까 신사적이 아니라 말이지. 그건 세상에는 그런 말 안하기 때문에.
그게, 그게 어쨌든지, 듣기 싫든지 말든지 그 속에 믿어지는 믿음을. 생명을 넣어 주려 하면, 교만한 자는 교만해서 넘어지고 그 속에 한번 그렇게 말함으로서 다져서 믿음이 생겨지게 할 자는 생겨지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 그말이오. 뭐 그까짓 소리 한다고 그런 소리에 눈을 뜰 줄 압니까? 여기 설교하는 것이 다 지금 다 기록돼 있어. 여기도 아침에도 공산주의가 와 있는지 몰라. 다 와 있습니다. 공산주의도 와 있고, ○정권의 정보과도. 다 정보에 대해 온 사람도 다 여게 있습니다. 비밀 정탐군이 다 여기 와 있어요. 와 있는데, 아직까지는 하나님이 막아서 그렇지 때가 되면 그런 거 다 들고 나와 가지고 그거 가지고 다 죽는다 그말이오. 죽을 줄 알고 증거하는 것이고 죽는 그것이 죽는 것이 아니고 확실히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암만 죽여 봤자 나 좋게 하지, 하나님의 진리와 영감대로 말하고 영감대로 생각하고 영감대로 주장하는 것은 좋게만 하지 해 지우는 것은 털끝 만치도 해를 지울 수는 없다, 해 지울 존재는 하나도 없다 하는 것을 벌써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데 대해서 상관이 없어.
여러분들, 여기서 깨달으십시오. 두 가지를 오늘 아침에 깨달으십시오. 믿음은 현재에 있는 믿음이 믿음이지, 현재에, 이 시간에 믿는 믿음이 믿음이지. 또 믿음은 그 실상을 대할 때에 그 실상에 대해서 믿는 믿음이 믿음이지, 실상을 띄워 놓고 현재가 아니고 멀리 두고 과거에 두고 이와 같이 믿는 척 하는 거는 전부 거짓부리라 그말이오. 이러니까 우리가 이것을 고쳐야 됩니다. 세상 거야 그까짓 거 못 취해 봤자 이것 없으면 저것 가지고 살고 저것 없으면 이것 가지고 살고 하지만 이것은 영영히 자기가 멸망을 받느냐 구원을 받느냐 하는 중대한 문제입니다.
저는 어제 ○○○조사님에게 대해서 내가 행복감을 가졌습니다. 그 사람 여게 이십여 년을 배웠는데. 저는 예수 믿을 때에 그렇게 믿는 것을 사람에게는 한 마디도 배우지를 못했습니다. 그때는 예수 믿는 사람이 어짠지 옳게 가르치지를 안해요. 장로님이 저를 인도한 분인데 그분도 보면 뭣이든지 옳다 그렇게 하는 게 아니고 그저, 그저 이래 두루두루두루 이래 믿지 요게 요거냐 조게 조거냐 물으면 거게까지는 나갈 필요 가 없는 것이라. 끝까지 나아가야 되지 끝까지 나아가지 안하면 중간에 가다 만 거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거룩이라 하는 것은 모든 것이 많이 있는 데 구별하고 구별해서 `요게 요거다, 요게 옳다' 참이라 하는 그게 도달하고야 이제 끝을 마치는 그것이 거룩한 사람이요 진실한 사람입니다.
이러니까, 여러분들이 현재를 닥치면 없고, 실상을 닥치면 그 믿음이 벼 해지고.
현재를 닥치면 그 믿음이 변해지고 실상을 닥치면 그 믿음이 변해 지는 믿음은 나를 속이는 믿음이요 소용없은 믿음이라는 것을 알아서 여기서 확정을 지워야 합니다. 원수가 아무리 나를 미워하고 나에게 아무리 억울한 소리를 해도 내가 참아야 되지, 참아야 되지 참는 것이 옳지. 억울한 소리를 해도 참아야 된다는 것을 띄워 놓고는 얼마든지 하는데 억울한 소리를 딱, 만났습니다. 억울함을 딱 만났을 때는 자기가 참고 견디지 못하면 그 억울함을 당한 실상에 대해서는 믿음이 없는 것이고 현재에 대해서는 믿음 이 없는 것이라 그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믿음은 현재와 실상에 있는 믿음이 믿음이지, 거기 대한 믿음이 믿음이지 현재를 떠나서 실상을 떠나서 믿는 믿음은 그까짓 거 암만 믿는다고 떠들어 봤자 소용이 없는 믿음이라. 이러니까 제가 잘 믿느니 뭐 어쩌니 하지만 지금이라도 공산주의가 와 가지고 예수 믿는 사람 막 잡아 죽인다고 달라들면 그 앞에 가 가지고 다 표가 나타난다 말이오. 그거 다 구별나요.
전라도 이리에서는 예수 믿는 사람을 전부 갖다 놓고 하니까 전부 다 `이제는 내가 예수를 믿되 당신들 기독교 연맹, 기독교 연맹에 가입을 하고 믿겠습니다.' 기독교 연맹에 가입하는 것은 연맹 조건이 뭐이냐 하면 그들 시키는 대로 하고 예수 믿는 것입니다. `그래 예수 믿겠다고도 여기 가입을 하면 당신은 안 죽일 것이고' 전부 가입 다 해. 가입 안 하는 사람이 없어. 가입 안 하는 사람 집사 하나 있었어. 집사 그거 하나 살았지 나머지는 전부 다 죽였어. 예수 믿는 사람 다 죽였어. 이리에 있는 사람 다 죽이고 이리에 예배당이 텅텅 비어. 예배당은 전부 그들이 다 이용하고 말이지 인민군이 이용하고 말았어요 그 사람들이 하나님 믿지만 실상을 당하니까 전부 부인 해 버렸어. 현실을 당하니까, 전부 현재를 당하니까 전부 부인했어.
그러기 때문에 현재에 이 시간에 믿을 것을 이 시간에, 현재가 딱 당하니까 그만 그 믿음이 없어져 버리고 현실상을 당하니까 믿음이 없어지는 거는 소용이 없다.
그러기에, 실상에 대한 믿음과 현재에 대한 믿음이 그것이 믿음이다 그거 여러분들이 하나 기억해야 되고, 또 하나는 그러면, 없는 믿음을 어떻게 해서 믿음을 생기게 했느냐? 없는 믿음이 마르다가 마지막에는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는 데까지의 진실한 믿음이 생겨졌으니, 나사로가 산 것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믿음으로 산 것입니다. 그 믿음이 아니면 예수님은 하시지 못해. 믿음이 아니면 하지를 못해. 하나님이 믿음으로 준다 했기 때문에 믿어야 하나님이 일을 할 수 있지 그러기 때문에,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 우리가 우리 할 일은, 우리 할 일은, 우리가 할 하나님의 일 한 거는 뭐이냐? 우리가 할 하나님 의 일은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하나님의 일은 믿는 것이오. 믿으면 당신이 믿는 그대로 하신다 그말이오.
그런데 그렇게 공중에 뜬 다 허망한 믿음, 상식 믿음. 거짓 믿음. 외식 믿음이 이렇게 죽은 자를 살려낼 수 있는 이 믿음으로 성장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성장된 것이 어디 잇소? 이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될 것입니다. 성장된 것이 어디 있소? 어디서 성장 됐지? 네. 이 이름이 뭐이야? 이 사람 내가 지금, 내가 지금 보고 있는데. 나이가 몇 살이오? 장가 갔어? 안 갔어? 안 갔어? 벌로 장가 가지마. 마누라 잘못 얻어 놓으면 신세 간다. 낯짜구나 반들반들 보고 하면 안 돼.
믿음 좋은 사람보고 가야 되지. 그라겠어? 보면 알아요.
그래 믿음이 없는데 그 믿음이 생겨지는 것은 주님의 말씀 한 마디 듣고 나니까 의심했던 믿음이 또 새로 믿음이 생겨졌고 또 생겨졌다가 또 좀 더 가까이 실상을 만나니까 또 그 믿음이 없어져 버리고 없어진 것이 또 주님의 말씀 한번 듣고 나니까 또 믿음이 생겨졌고, 이래서, 우리의 믿음은 성경 말씀을 읽는 데에서 설교를 듣는 데에서, 그 말씀을 자기가 새김질하는 데에서 자꾸 믿음이 생겨집니다. 우리 맏음이라 하는 거는 하나님 말씀에서 생겨지는 것이지 자기가 세상 지식 가지고, 상식 가지고 무슨 자기 주관이나 이런 거 가지고 해석하고 연구해 가지고 믿음이 생겨지는 거 아닙니다. 믿음은 순전히 하나님 말씀에서 생겨진다는 것을 우리가 굳게 잡아야 합니다.
지난 밤에는 재독에 참석한 사람이 286명인데 다른 사람들은 재독 참석 안 하고 다 알고 있는지? 여러분들이 재독을 말이오, 오늘 아침에 이런 것도 그 말 아닙니까? 재독을 한 번 듣고 나니까 믿음이 생겨집니다. 두 번 듣고 나니까 믿음이 그만치 생겨집니다. 세 번 듣고나니 믿음이 그만치 생겨집니다. `아, 내가 들어서 그대로 설교할 수도 있는데' 하는 것은 그것은 지식 믿음이요 상식 믿음이기 때문에 그 자에 교만이 들어서 자기를 죽였습니다. 또 들으면 또 거기서 하나님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는 절대 독자적인 전능의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을 한 번 들으니까 내게 믿음이 생겨지고 두 번 들으니까 믿음이 생겨지고 생겨지는 데 자꾸 재독을 들어야 믿음이 생겨질 터인데 이제 `한 번 들으면 다 아는데' 재독하러 가는 것은 어리석게 천하게 보입니다. 교만해서, `뭐 재독을 하러 가?' 그렇게 교만한 것은, 교만한 거는 네 교만이 네 원수라. 교만이 들어서 너를 속였다. 자기를 속였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어짜든지 작정한 기도를 놓지 마십시오.
이번에 필요가 있어서 버스 중형 버스를 하나 샀는데. 그 버스 사는 데는 여전도회에서 이백만 원 댔습니다. 남전도회는 돈이 없어. 남자들은 다 죽었어.
남전도회는 돈이 없어서. 하나도 남은 것이 없어. 왜 돈은 제가 벌고 뭣 때문에 쓰지는 못하는고? 왜 심으지는 못하는고? 남자들 다 죽었어. 그것도 정신 차려야 돼요. 이것도 다 듣기 싫은 말이지만 새겨 들어서 안 들으면 죽어. 그만큼 귀중한 말이라. 여전도회는 돈이 남아서. 돈이 남았는데 그라고도 남아. 그라고도 남아 있어. 이백만 원 됐고, 또 중간반 반사들이 135만 원 댔고, 권찰회에서 65만 원 댔고 그래 가지고 사백만 원 주고 중 버스 하나 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