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2 22:21
사람병을 고쳐라
1984. 3. 3. 토새벽
본문: 시편91편 1절-16절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군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나니 너는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 오직 너는 목도하리니 악인의 보응이 네게 보이리로다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로 거처를 삼았으므로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저가 내게 간구 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 하시도다.
제가 두 시경 되어서 벌써 잠은 깨어 가지고서 조금 눈 감고 명상 가운데 있었는데 고만 내가 그 전쟁 속에 몰리게 됐습니다. 그 전쟁 속에 몰려 서 모두 다 당황하고 그저 참 놀래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 그런 가운데에 있었는데 그 군인과 평민들이 섞여 있는 그 사이에 제가 끼여 있었습니다. 그때에 모두 다 공론이 나기를 아무래도 저 우리 아군의 부대속으로 들어가야 부대 안으로 들어가야 우리가 산다 하는 그런 것이 다 공통이었습니다. 부대 안에 들어가야 식량도 보급이 될 것이고, 또 우리 생명을 유지하게 된다 해서 부대 안으로 들어가야 되겠다는 그 공론이 다대수였습니다. 그런데 그 적군은 가까이 사격 해 오고 또 아군의 그 부대는 좀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 산을 하나 넘어서라야 가게 되는 그런 거리에 있는데 나도 그 속에서 '이거 어떻게 하나' 생각을 하면서, 그래 놓으니까 그때는 지금 평소의 마음이 아니라 '자, 저 덤불 밑에 가서 숨어 볼까 저들이 지금 오면' 또 '저 어느 바위 밑에 가서 거석할까' 또 '그 공굴 따리 밑에 가서 숨어 볼까' 숨을 자리를 좀 생각했습니다. 생각하다가 '저게 숨어봤자 하루 이틀에 끝나면 하지마는서도 몇 달이 될는지도 모르는데 거기에서 숨어 가지고서 어떻게 견디겠나?' 또 그런 생각이 내게 연상적으로 나왔습니다. 또 '아주 뭐 세밀히 들추어서 잡는데 거기에 숨어 봐야 다 결국은 발견되고 말지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또 그런 생각이 내게 연상적으로 나왔습니다. 또 그런데 한쪽머리는 말은 발표는 안 하는데 그 속에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적군이 오면 그 적군에게 항복을 하고 그리 피난하는 것이 좋겠다 그렇게 또 생각하는 사람들도 약간 말은 한마디도 안 하는데 그런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조금 있었습니다.
저도 이리 저리 당황하다가 그 전쟁 속에 포위되어 있었는데 당황하다가 다시 정신을 차려서 생각하니까 그 전쟁이 아주 내게는 아무런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그런 사소한 일이 되어졌습니다. 그때에, 내게 생각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라. 그러면 여호와로 피난처를 삼아야 되지 뭐 딴것 가지고는 안 된다.
여호와로 피난처를 삼아야 된다는 그 생각이 나서 제가 일어나 가지고 시편 91편을 두 번을 읽었습니다. 읽고, 또 637장 찬송을 한번 또 들여다 봤습니다.
그것이 오늘 아침에 이 말씀을 봉독하게 된 동기입니다. 그래서 한번 본문을 읽어 주고 거기에 대한 것을 간단하게 말을 하려 그런 생각을 가졌습니다.
참, 그 전쟁이라 하는 것은 아주 참 심히 비극의 것입니다. 요새 우리나라에서는 이산가족을 찾아 주는 그런 아주 참, 위로의 일, 힘드는 그런 일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대단히 고마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 이산가족이 된 그 모든 형편을 보면 다 사람들이 상상도 못할 그런 형편으로 다 나뉘게 됐습니다. 저도 전쟁을, 그러니까 바로 전쟁 치르기를 세 번 치른 턱입니다. 제 2차 대전을 치렀고. 또 6·25를 치렀고, 그 뒤에 남은 그 공비전에 또 제가 참여를 했고. 세 번 치른 셈인데 그때 것이 또 연상이 됐습니다.
말도 듣고, 또 제가 목견도 하고 했는데, 그 뭐 참, 사람들이 여보 당신 하고서 그 부부간이라면 그저 태산같이 그 남편을 의지하고 바라보고 든든히 염려없이 안심하고 살고 있고. 또 더군다나 그 순진한 어린 아이들은 엄마 아빠 하면서 뭐, 하나도 근심 걱정 없습니다. 없고. 그저 이 엄마 아빠면 만사가 다 해결이고 평안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다 그런 형편이었는데, 이 전쟁이라는 것은 그런 것을 참 아주 무정하게도 그만 끊어버립니다. 뭐 언제 그런 마음 없었지마는서도 그만 그 부부간도 생각지 못하는 그런 형편으로써 서로 나뉘게 되고, 또 사랑하는 전적 의지하고 바라보는 그 자녀들도 생각도 못할 그런 의외의 일로써 다 놓치고, 어머니 아빠를 잊어버리고 우는 그런 아이들을 제가 6·25 때에 많이 봤습니다.
부모가 그걸 데리고 그저 뭐 손목 잡고 오니까 탄탄하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어쩌 오다 보니까 고만 아버지는 공습에서 죽어 버렸고, 어머니하고 단 둘이 이렇게 만내 가지고서 그래도 뭐 울음도 간 곳이 없고, 급해서 또 이렇게 가다가 그 뭐 어째 우루루 하니까 그 사람이 정신차릴 여가도 없이 고만 공습이 와 가지고서 이렇게 서로 생각지 못하고 숨었는데 나중에 공습이 끝나고 보니까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아이 찾아서 어디로 갔는지 없고. 아이는 또 아이 대로 어머니 찾아서 어디로 갔는지 없고, 그래 가지고 모두 다 이산가족들이 됐습니다.
저도 그런 것을 많이 봤습니다. 후퇴할 때도 많이 왔고, 또 전쟁으로 쳐 내려 올 때도 많이 봤고 이래 봤는데 제가 좀 생각을 해 봤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런 일을 언제 닥칠지 모릅니다. 그저 부모나 자녀 사이 또 철없는 어린 아이와 그 부모 사이. 또 든든히 아무 거침없이 의지하고 바라보는 그 형제 사이 그런 사이가 이 전쟁이라 하는 것은 참 비참하게 고만 끊어 버립니다. 우리가 이런 일이 없으리라 그렇게 생각을 못합니다. 6·25가 나기 전에 전쟁을 많이 사람들이 봤고, 환상에서도 봤고, 꿈에서도 봤고 그래서 강단에는 전쟁 설교들이 얼마나 많이 나돌고 난 다음에 6·25가 났었습니다. 또 왜정 말년에도 저는 믿은 지 그때 얼마 안 됐지 마는서도 그 전쟁이 나기 전에 그런 일이 있었고, 전쟁이 또 완전히 해결돼서 남북이 갈라질 것과 또 팔월 십오일은 몰랐는데 팔월 달에 해결이 된다는 것도 보고, 제가 그 때에 그 책에 기록해 놓은 것이 지금도 있습니다.
이랬는데 이런데 언제 어찌 될지 우리가 모르는데,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으냐? 홍포 입은 부자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홍포 입은 부자가 자기가 그 음부에 가 가지고 불꽃 가운데서 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그가 그 형제 다섯에 대해서 아브라함에게 호소한 것을 보면, 그가 그 형제들을 사랑한다고 위한다고 한 그것이 과연 위함이 됐던가? 그 형제를 얼마나 속임이 됐다는 그 마음이 얼마나 원통했기 때문에 자기가 불꽃 가운데서도 그것을 기억하고 아브라함에게 부르짖었을까? 이것은 비유가 아니고 사실을 주님이 우리에게 한 건을 내어다가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연상하면서, 그러면 지금이라도 막상 6·25와 같은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하면 어찌 되나? 뭐, 하나님이 막으시면 막으시지마는서도 저 청진으로 원산으로, 그리는 전부 소련 함대가 와서 꽉 채여 있습니다. 그러면 그 함대만 하면 우리 남한이라는 것은 꼭 다 포위할 수가 있답니다. 그러고 있지, 또 세계가 이렇게 여기에 저게서 다 요란하고, 또 미국이 우리를 후원한다고 하지마는 뭐 무슨 어데 절대성이 있겠어요? 하고 싶은 마음도 있고, 할 수 있지마는서도 어느 정도지 그것이 절대성으로 후원이 된다고는 그렇게는 생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안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든지 우리가 평화 통일을 하자 어쩌든지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우애있게 그렇게 되기를 원하고 노력하자 하지마는 그들은 모르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지, 외나 거기에 대한 주권은 주님이 가지시고 당신의 철두 철미하신 그 필연성의 법칙을 가지고서 이래 가지고 있는데, 그분을 모르니까 뭐 인간끼리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이래 말하는 그거 말해 봐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그런 말이 소망이 되고 위로가 될는지 모르지마는서도 하나님의 절대 주권자의 그의 선포한 법칙과 또 그분이 오늘까지의 모든 사람들을 처리 해 나온 그 역사를 생각해 볼 때에 뭐 그런 말로서는 우리가 하나도 위로가 되지를 아니랍니다. 그저 그 분이 어쨌든지 해결지어야 되지. 이런 모든 것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이런 일을 언제 닥치지 않으리라 생각지 못하고 닥칠지 모르는데, 모두 다 우리가 참 서로 의지하고. 바라보고. 믿고, 태산같이 이렇게 든든히 여기고, 또 천진난만하게 안심하고 바래보는 그 모든 자에게 무엇을 우리가 줘야 될까 하는 거기에 대해서 좀 한번 생각을 해 봤습니다.
우리가 뭐 그저 그런 자에게 홍포 입은 부자 모양으로 이런 것 저런 것 다 힘껏 해 주지 않습니까? 힘껏 해 주지마는서도. 그 해 준 그것이 홍포입은 부자가 음부에 가서 생각할 때에 속인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하는 그것이 너무 형제들에게 미안하고. 부끄럽고. 원통하고, 분해서 그런 불꽃 가운데에 있으면서도 그 고통보다 거기에서 다른 걸 생각이 없고. 형제 다섯에게 이 소식 좀 전해달라 하는 그 말을 하지 안했는가 하는 그런 생각을 가져 볼 때에, 우리가 만일 전쟁이 일어난다고 하면, 우리가 사랑하는 그 아내를 어떻게 그를 도와 주며. 또 남편을 도우며, 자녀가 그렇게 바래보는 그 자녀에게 속이지 않는 그런 방편으로 뭐 구원할 길이 없는가 하는 것을 한번 생각 해 봤습니다.
저도 두 시부터 늘 생각하면서, 마음에 인간이 너무 어리석고 불쌍함에 대해서 좀 눈물도 흘려 봤고, 불쌍하고 인간은 참 어리석습니다. 이러니까 하나님이 뭐 사람의 그 무엇에 대해서 그렇게 분개할 수 없는 것이 어리석으니까 그러니 우리가 누구에게 나를 바래보고, 의지하고, 믿고 안심하고. 따르는 그 자를 누구에게 맡기면 될까? 그걸 한번 생각 해 봤습니다. 뭐 이런 강대국에게 맡긴다는 그것도 우리 지식으로는 그까짓 거 아무런 책임질 만한 그런 힘이 없습니다. 또. 무엇을 어떻게 해서 물질로 무엇을 준비시켜 준다 하는 그것도 참, 너무도 허무한 일이고 이러니까 최종적으로 맡긴다는 것이 주님에게 맡기는 거 외에 딴게 뭐 있겠나? 그저 주님에게 맡긴다면, 우리는 주님에게 그를 부탁하면서 위해서 기도 하는 거 외에 딴게 뭐 있겠나 그런 생각을 가져 봤습니다. 그러니까 나를 바래보고, 의지하고. 또 딿고, 또 내가 책임지고, 관계있는, 뭐 나를 목사로 말하면 이 서부 교회에 속한 이 주일 학교 수천의 주일 학생을 누구에게 맡기며, 중간반을 장년반을 누구에게 맡기냐? 그 최종적으로 할 길은 그저 이들을 위해서 하나님에게 부탁하는 기도밖에는 없다 하는 그런 것을 생각을 가졌었습니다.
그러고, 그다음에 할 일이 있다면 뭐 하겠느냐? 할 일이 있다면, 그저 어데서든지 천지는 변해도 우리 주님은 창조주시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다. 또 모든 것이 다 시간에 제한을 받아서 아무리 거저 자기의 목숨도 아끼지 아니하고 책임지고 돌볼라고 애를 쓴다고 해도, 그만 얼마 시간이 지내가면 그저 할 수 없어서, 그만 참, 눈물로 그만 두고서 어쩔 수 없어서 두고 떠나는 그 시간에 너무 제한을 받는 짧은 인간이며, 또 아무리 부하고 싶어도 공간에 제한을 받아서 그 뭐 나중에 가서 이산가족들 찾은 사람들 말을 들어 보면, 그저 그때에 요 덤불 밑에 있고 조 덤불 밑에 있었는데 서로 고게서 보지 못하고 서로 자꾸 찾는다 하는게 자꾸 멀리 멀리 떠나 가 가지고 그렇게 서로 나눠진 것을 그런 것을 간증하는 것을 봤습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이 공간에도 너무 제한이 많기 때문에, 이 자리서는 내가 능히 구원할 수 있어도 고만 그 장소를 떠나면은 전혀 구원하는 힘이 없습니다. 이 자리서는 뭐, 만반에 구원할 수 있는 모든 준비도 있고, 모든 재료도 있어도 고만 장소만 시나면 고만 구원하지 못합니다. 마치 육지에서는 구원 할 수 있던 사람이, 바다 가운데에 빠지고 나면은 다시 거기에서는 구원 할 수 없는 거와 꼭 같은, 이 모든 공간이 다 그와 같습니다. 육지라 해도 다 그와 같습니다. 이러니까 공간의 제한을 받으니 이것도 참 아무런 내가 의지가 돼 질 수가 없고, 그의 소망이 돼 질 수가 없고. 그의 안보가 돼 질 수가 없고 이러니 이거는 그저 두 가지 밖에는 할 길이 없다 하는 그런 것을 느꼈습니다. 하나는 주님에게 부탁할 것, 그저 주님에게 아무래도 주님이 이들을 맡아주셔야 되겠습니다. 당신이 맡아 주셔야 되지, 당신이 맡아 주지 안하면 아무도 맡을 이가 없습니다. 맡길 이가 없습니다. 부탁할 이가 없습니다. 당신 밖에는 맡아서, 내가 장수함으로 그를 만족하게 하겠다고 하신 말씀같이 주님은 언제나 계시니까 당신만이 이 시간적으로 봐도 맡으실 이가 당신뿐이고, 또 공간적으로 봐도 당신뿐이시고, 모든 이 권력적으로 봐도 당신밖에는 없습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주님에게 밖에는 맡길 때가 없으니까 부득이 주님에게 우리는 맡기는 것은 그저 기도할 것뿐입니다. 기도할 것 하나 있고, 또 하나 더 있다고 하면, 그저 그이에게 너는 나도 의지하지 말고 바래보지 말아라. 아빠 엄마도 의지하지 바라보지 말아라. 또 네 젊음도 의지하고 바라보지 말아라. 그 뭐 네 형편과 환경이 조건이 좋다고 그런 것도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지 말아라. 이런 것은 다 물 위에 거품같고 바람앞에 등불 같이 언제 어떻게 되어 질는지 변해질는지 모른다. 그러기 때문에 여호와를 의지하라.
여호와를 바라봐라. 여호와를 바라보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고 그 모든 재앙이나 환난이 그에게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그분을 네가 의지하고 바라보면서 그분을 따라라, 그것 밖에는 우리가 모든 나와 관련된 사람에게 부탁할 거는 그것 밖에는 없고 또 내가 해 줄 것은 기도밖에는 해 줄 것이 없고 이 외에는 딴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제가 좀 새삼스럽게 한번 느껴 봤습니다.
그런고로, 우리 교회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기도회를 과거에 시작했다가 얼마 중단을 하고 시작함으로써 그때에 참 신령한 유익을 많이 봤고, 또 육체적인 유익도 많이 봤습니다. 그라다가 너무 낙관 되어 가지고 그만 중단을 했었는데 중단한 이 기도회를 다시 주님께서 시작하게 해 주신 것을 참 대단히 감사히 생각을 합니다. 그저 우리가 그렇지 않으면 고만 여기에 대해서 관심없이 스스로 지냈을 터인데 이 기도회를 시작하고, 우리가 역부로 등록을 받고, 또 권면도 하고 이렇게 해서 그저 하룻밤이면 육칠백, 오륙 백 명이라도 교회 와가지고 기도하고, 또 다른 처소에서도 기도해서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그분에게 우리가 구할 수 있는 이 지혜를 얻었고, 우리는 구할 수 있도록 주님이 다 공로를 설정해서 만반에 준비를 갖추어 놨지마는서도 우리가 미련하고 게을하고, 어리석고, 교만해서 다 예사롭게 생각했는데 우리가 주님 앞에 기도해야 된다, 구해야 된다 하는 이런 깨달음을 우리에게 주신 주님 앞에 얼마나 우리가 감사해야 될런지. 그래서 그래도 몇 천 명이 주님 앞에 자기와 또 자기의 모든 관련된, 사람들과 또 자기에게 대한 모든 좋고 어려운 그 모든 제반사를 주님에게 고해서 기도하게 된 것이 이것이 얼마나 우리가 참, 큰 축복을 받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할 것은 그저 이 기도를 게을리지 말고, 그때 후회하지 말고 미리부터 우리가 충분한 기도를 하도록 합시다. 뭐, 그저 참 아빠 엄마 손을 잡으면 뭐 그만 천지가 다 무너진대도 그런 것 아무것도 모르고 안심하고 따르는 그이에게 참, 정말로 내가 그런 의지가 돼 질 수 있느냐? 의지가 못됩니다.
그이가, 그들이 바라보는 소망의 대상이 되느냐 하면 소망의 대상이 못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일찍부터 그것을 가르쳐서, 나는 너의 소망의 대상이 못된다.
의지의 대상도 못된다. 나는 너의 참, 후보자와 후견자가 되지 못한다. 그저 네가 의지할 만한 이는 주님뿐이요, 바라볼 만한 이는 주님뿐이다, 이러니까 주님만 바라보고, 의지하고, 또 그를 따라라. 그를 따르면 그가 결코 버리지 아니하신다 하는 것을 그저 시간 있는 대로 가르쳐서 깊이 인식을 시켜 놓은 이것이, 이보다 더 큰 선물이 없을 것이고. 이보다 더 큰 유업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고로, 여호와로 그들에게 참, 유업을 삼도록, 유업을 시켜 주는 이거 외에 그들에게 할 일이 없고, 그들에게는 이거 외에는 할일이 없는 줄 압니다. 그래서 우리가 평소에 자녀들이나 친구들이나 이웃들이나 책임 맡은 모든 자기 반 학생들이나 자기 권찰 식구들이나 자기 교인들을 그들에게 대해서 할일은 이거 외에는 할일이 없을 줄 압니다. 어쩌든지 여호와는 여호와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못 박히기 전에 어두울 때 나타나신 주님이 여호와십니다. 어두울 때에 나타나신 주님이 여호와시요, 좀 종교지식이 발달돼서 장성하고 광명한 때에 나타나신 분이 그리스도 예수십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그저 뭐, 물론 이런 의식주도 중요하지마는 의식주를 줘서 그들을 나를 바라보고 의지하는 그이에게 의식주를 줘서 안심을 시킨다는 그것은 결과적으로는 속이는 것뿐입니다. 그 속이는 것뿐이지 아무런 의지가 못되니까 그때는 다 그들을 낭패만 시킵니다. 이러니까 그저 그런 것은 그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합니다. 뭐 그 이상 있어도 좋겠지마는서도 그 이상은 그렇게 절대성 있는,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다만 여호와를 바래보고.
의지하고, 그분만 꼬박꼬박 따라 나가는 그 이 세 가지 지식을, 그 분을 바래보고 그분을 의지하고 그분에게 순종하는 이 세 가지 지식을 그들에게 확고하게 해 줬다고 하면 전쟁이 나도 우리는 안심 할 수가 있겠고, 뭐 또 우리가 세상을 떠나도 안심 할 수 있겠고, 이 세 가지만 그들에게 참, 유산으로 유업으로 끼쳐 주고 간다고 하면 우리는 홍포 입은 부자와 같은 그런 후회 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런고로 우리가 내게 속한 모든 사람들에게는 줄 것이 해 줄 것은 이거 세 가지뿐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 세 가지 해 줄 것은. 내게 속한 모든 사람에게 줄 거는 이 세 가지뿐이니 이 세 가지 외에 준다는 것은 다 알고 보면 공연히 썩은 새끼에 매인 것처럼 공연히 썩은 작지 의지했다가 낭파 당하는 것과 같이 아무 의지하지 못할 것이며, 바라보지 못할 것이며, 또 아무리 따라 봤자 아무 소득 없는 그런 것들이니까 다 속인 것밖에는 안 되겠고. 이러니까 그저 주를 바라보고, 의지하고 따르라 하는 이것을 그들에게 그저 또 말하고 말하고 해서 그 속에 지식의 전부가 되도록, 가득 차도록 그들에게 주는 이보다 더 그들에게 해 줄 일은 없는 줄 압니다.
그리고 또 우리가 내 자신과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에게 할 것은 그저 맡기면서 기도할 것 외에 딴 것이 없는 줄 압니다. 주님에게 부탁하면서 이 들을 다 맡아 주시옵소서. 이를 다 책임지시고 주께서 그저 주님이 책임지시고 인도하신다면, 물도 좋고, 불도 좋고, 아무것도 상관없고 그저 주님이 책임지신다면 결과적으로는 다 생명과 평강이 될 것이요, 또 주님이 책임지고 인도하시고 안보해 주신다 할지라도 그들이 바라보고, 의지하고, 따를 수 있는 사람들로서 우리는 충분한 지식을 그들에게 넣어 주고. 또 딿지 안한다면 또 탈이니까 그저 그들이 바라보고, 믿고, 의지하고 하나님에게 간구하고 하는 이것 두 가지 외에는 할 일이 없겠다 그런 것을 제가 느껴 봤습니다.
그래서 그때에 제가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는데 거기에서 당한하고, 이렇게 생각하다가 아, 내가 피난 할 것은 따로 있구나 하는 것을 그때 발전했습니다.
발전해서 여호와가 나의 피난처다. 주 안에 있는 자에게는 딴 근심이 없다. 네가 내 안에 있으면 모든 좋은 결과를 맺고, 상하지 않는다 하는 그 주님만이 우리의 참, 피난처요 은신처가 되는 그것을 그때에 제가 발견을 하고, 모든 사람은 당황하고 놀래고 있는데 그때에 아주 순간적이나마 아주 기쁨과 평강과 만족을 제가 누려 봤습니다.
제가 왜정 말년에도 그때에 뭐 후방에 있는 사람들은 다 후방에서 전장에 그 모든 필수품의 보급에서 고생을 당했는데 저는 그 전쟁 가운데 있었지마는서도 그 필수품 보급에 고생이라 하는 것을 하나도 당하지 안했습니다. 고생을 하나도 당하지 안하고 오히려 그것이 들어서 저에게는 더 평강이 되었고 아주 부강이 되어졌지 하나도 그 어려움을 당하지 안했고, 또 신사참배 그 어려움도 저는 아무런 어려움을 몰랐고, 그저 벌로, 무서운 두려운 줄도 모르고 해서 평강으로 내나 형통했었고, 또 6·25 때도 그랬습니다. 6·25 때도 6·25라는 것이 뭐 집회만 자꾸 계속하니까 은혜만 더 충만했지 아무런 그런 것 어려움 없었는데 여호와를 의지하다가 다른 것을 의지하는 그 순간에 실수, 기도하고, 의지 안하고 하나의, 예배당에서 교회라는 그 처치(church)라고 영어로 쓴다는 뭐 고걸 내가 기도하지도 안하고 그만 '그래 봐라'하는 그 한 마디에서 한 달 동안은 녹아서 매일 열 번, 아마 여남은 번 죽고 여남은 번 살았을 것입니다. 고만 생명 내 놓으면 평안하고, 또 살라 하면 또 죽을 지경이고 그래서 그런 꼴을 봤습니다.
우리가 이 기도회를 작정해 주셨는데 이 기도회에서 어쩌든지 기도하고 깨끗이 준비합시다. 이번에 성찬식이 우리에게 이게 뭐이 될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모릅니다. 그저 이 성찬식으로 깨끗하게 준비 해 가지고서 앞으로 환난 준비인지 평강을 끌고 올 것만 모릅니다. 어쨌든지 요번 기회에 거리끼는 것 다 회개합시다. 뭐 물질적으로 거리끼는 것도 다 회개하고, 또 인인관계에 거리끼는 것도 다 회개하고, 또 하나님과의 관계에 거리끼는 것도 다 회개하고, 또 물질면에 거리끼는 것도 다 회개하고. 남녀 이성면에 거리끼는 것도 다 회개하고, 또 도덕면에나 또 사회면에 그런데 거리끼는 것도 다 회개해서 깨끗이 회개합시다. 어쩌든지 그 뭐 회개 못할 것 없습니다.
지금은 모두 낙관하고 있지마는서도 그때 그 6·25라든지, 왜정 말년이라든지 6·25가 지나고 난 다음에 토벌대가 와 가지고서 저는 그때 한 전쟁을 치렀습니다.
그때 뭐 토벌대에게 많이 맞았는데 그 토벌대가 토벌대가 아니고, 공산주의가 토벌대에 그 가장을 쓰고 와서 나 때문에 그 면(面)에서는 인민 공화국 기성식을 못하도록 그때 했으니까 그거 앙심을 가지고서 그때 또 저는 많이 당했어. 당하나 뭐 이런 작대기로 가지고서, 작대기가 몇 개 부러지도록 사정없이 그자들이 날 때렸는 데도 주님이 대신 막아 줬는지 하나도 상하지 '저 놈이 저' 모두 사람들이 다 '저거 죽었다 완전히 죽었다' 했는데 다 때리고 난 다음에, 다 때리고 그치고 난 다음에 나는 그때 일어나 가지고서 지서로 갔습니다. 지서에 가 가지고서 '이 토벌대로 온 사람들이 이럴 수가 있나? 어디 이럴 수가 있나? 이거 너거 책임지고 해 내라' 이라니까 '우리가 다 연락을 하고' 그때는 전화가 없어요.
전화가 있으면 내가 그 경찰서로 할 건데 '우리가 거석할 터이니까 죄송하다고서, 올라가시라고서, 또 그때 올라오는데 또 괜찮았습니다. 집에 오니까 집에서는 모두 다 교인들 모아 가지고 인제 죽었다 이랬는데, 뭐 나는 하나도 아프지도 안하고 기운 있어 끈들 끈들 이래 내가 찬송하면서 올라갔습니다. 올라 가 가지고서, 그래 맞아도 하나님이 맞아 주는지 아프지 안해요, 그 이상해요.
상하지도 안하고.
우리가 기도하고 깨끗이 회개해서 나는 그때에 그 깨끗과 그때에 그 기도를 내가 지금 참 사모가 됩니다. 나는 그때는 그저 기도를 많이 했고, 기도하되 산에 가서 기도하면, 돌에 반들반들한 돌에 가서 기도 하지를 안 했습니다. 어데든지 다니면서 좀 까끌까끌하고 모지고 좀 앉기 좀 불안한 그런 돌에 가서 기도했습니다. 이래 기도하고 일어나면, 온 몸뚱이는 꼭 콩모양으로 거저 옴폭옴폭하고 동글동글하고 그래 가지고서 그래서 늘 그런 자리 찾아 다니면서 기도했고, 8·15 해방도 제가 덕유산이라는 그 덕유산 상봉 그 산에서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그때 그렇게 기도했는데 지금 그래 기도가 안돼요. 며칠 전에 제가 양산동이라 하는데 가 가지고서 기도 하려고 산에다가 천막을 쳐 놓고서 그래 기도를 하는데 기도를 할라 해도 엎드려서 기도해도 얼마 못 견뎌 말이 안 됐고, 또 앉아서 기도해도 또 힘이 없어 그리 돼지고. 기도도 젊을 때 하고 힘 있을 때 해야 되지. 힘 없으면 기도를 못해요. 이러니까 어쩌든지 우리가 기도하고 깨끗히 합시다.
나는 그때는 참 깨끗했는데 요새 여기에 부산 와 가지고서 고만 이런 일 저런 일 처리하는 가운데서 뭐 더러워진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내가 부산에 와 가지고 똑 하나님 앞에서 잘못한 것 세 가지가 있는데 그 세 가지 중에 한 가지는 이 ○공장하고 시비한 것이 내가 후회되는 일 중에 한가지입니다.
어쩌든지 우리가 깨끗이 요번 성찬을 기해 가지고 하나도 하나님 앞에 자기 아는 대로는 흠이 하나도 없이 깨끗이 정리하고 깨끗이 회개합시다 또 뭐 물질로 해야 될 거면 물질을 애낌없이 회개를 하십시오. 청산을 하십시오. 청산하고 하나도 주님 앞에 거리껴서, 그저 거리끼는 그것 때문에 무슨 회개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그 어려움 그것보다는 주님 잊어버리는 것이 더 클 것입니다. 이 어려움 그것보다는 주님 차지 못하는 것이 그거 손해가 더 큽니다.
이러니까 주님을 자기 주님으로 모셔서 참, 자기가 성전이 되어서 주님은 자기 안에 계시고 자기는 주님 모신 성전으로 이렇게 되어지도록 어쩌든지 깨끗이 회개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이 기도의 그릇, 그 가나안 사람들도 죄가 아직까지 관영치 안해서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지 못한다 이랬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도의 그릇도 기도의 그릇이 관영해야 돼, 기도의 그릇이 차야 되지, 기도가 차지 못하면 그 일이 아직까지 미완성의 기도기 때문에 안 됩니다.
그러니까 언제 기도의 그릇이 찰지 압니까?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해서 그 그릇이 차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기도할 때에 우리에게 만족이 옵니다. '아. 이제는 주님이 들으신다. 이제는 들으신다, 이제는 됐다' 하는 그런 기도에도 제가 겪은 대로는 그 만족이 오고 이제 기도의 그릇이 찼다 하는 것이 그게 느껴집니다. 그럴 때는. 그라고 나면 그다음에는 그저 생각만 가지는 것이지, 그렇게 뭐 기도 할 그렇게 거석도 없고, 자꾸만 거저 늘 계속 고하기만 하고 있지, 그렇게 심한 애통으로 간절히 기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도 아버지가 들으셨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심한 통곡과 간구로 기도를 하셨음으로써 하나님이 들었다 했습니다. 그라면서도 하나님을 경외함을 인해서 들었다 이랬습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그렇게 기도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죄를 두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정말로 깨달으면 죄를 두고는 견디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두려워 할 것은 우리에게 죄를 없애는 것이 하나님 두려워하는 것이요. 죄를 두고는 하나님 업신여기는 것이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거 아닙니다. 네, 깨끗이 회개하도록 합시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지금 기도록에 등록된 사람은 사천 칠백 칠십 사 명입니다. 십 분 기도 후에 권찰회 모이겠습니다.
어쩌든지 뭐 낮이나 밤이나 공장에서든지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 지금은 회개할 때입니다. 이러니까 회개를 장소를 가리지 말고 어디서든지 생각나는 대로 자꾸 회개하고, 그저 지체하지 말고, 회개를 뒤로 미루지 맙시다. 미루지 말고, 회개말고 기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피할 길을, 시험을 감당하도록 피할 길을 내 주신 것이 곧 우리에게 기도회를 허락해 주신 것이요 또 이 성찬이 이렇게 연기된 것 특별히 뜻이 있습니다. 이러니까 회개할 기회로 성찬식을 주신 이 일을 인해서 깨끗히 해서 다 주님을 영접해서 참 주님의 피와 살과 내 피와 살이 연결 되어서 주님이 곧 내 머리되고, 나는 주님의 몸이 될 수 있는 이런 밀접한 결합을 이루어질 수 있는 금번 성찬이 되도록 그렇게 깨끗이 준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