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스위스 신앙고백서(1566) 1장-10장

  선지자선교회

1 : 하나님의 참된 말씀인 성경에 관하여

 

정경(正經)

 

우리는 거룩한 예언자들과 사도들의 구약과 신약인 정경(the canonical Scriptures)이야말로 하나님의 참된 말씀이요, 이것은 결코 인간에 의하여 그 권위를 부여받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충분한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고 고백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친히 족장들과 예언자들과 사도들에게 말씀하셨고, 오늘도 우리에게 이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보편적 교회는 구원에 이르는 신앙에 관련된 모든 것과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성화의 삶을 형성하는 데 관계된 모든 것에 대한 가장 완전한 해석이 이미 성경 안에 있음을 믿고 고백한다.

 

성경은 모든 경건을 충분히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된 지혜와 경건, 교회들의 개혁과 행정이 성경에 근거해야 한다고 판단한다. , 경건의 모든 의무에 관한 가르침과 교리들의 근거 및 모든 오류에 대한 반론, 특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17)라고 하는 사도의 말씀에 따르는 모든 권유는 모두 성경에 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이것을 네게 쓰는 것은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딤전 3:14,15)라고 디모데에게 말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또한 사도 바울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살전2:13)라고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주님 자신이 복음서에서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10:20). 그러므로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10:16, 13:20)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합법적으로 부름 받은 설교자들에 의해서 설교되어 질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선포된다는 사실과 이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믿는 자들에 의하여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을 믿는다. 우리는 이 말씀 이 외에 다른 말씀을 날조해 내거나 하늘로부터 내려올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설교된 하나님의 말씀 자체는 그것을 설교한 사람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 그 설교자가 악한 사람이요, 죄인이라 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참되고 선하다.

 

그러므로 참 종교에 대한 가르침과 배움이 성령의 내적 조명에 달렸다든가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31:34)"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7)고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우리의 외적 설교가 아무 소용없다고 우리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6:44)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성령의 내적 조명을 받지 않은 사람은 결코 그리스도께로 올 수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필히 외적으로 설교되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의 교역 없이 성령에 의해서 혹은 천사의 사역에 의해서 고넬료를 가르치실 수 있었다(사도행전).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 고넬료를 베드로에게 보내사 "그가 네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가르쳐 주리라."고 천사를 통하여 말씀하셨다.

 

내적 조명이 외적 설교를 배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사 내적으로 조명시키는 바로 그분이 동시에 그의 제자들에게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16:15)고 명령형식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빌립보에서 자주 장사인 루디아에게 말씀을 외적으로 설교하였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여자의 마음을 내적으로 열어 주셨다(16:14). 또한 동일한 바울은 그의 사상을 아름답게 전개한 다음 로마서 10:17에서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하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외적인 교역 없이도 그가 원하시는 자에게 그가 원하시는 때에 내적 조명을 일으키실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니께서 명령과 실례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대로 사람들을 가르칠 때 보통 방법대로 한다.

 

이단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이 성령에 기원했음을 부인하거나 성경의 어떤 부분은 받아들이지 않거나 성경의 일부를 왜곡시키거나 삽입시키는 아르테몬(Artemon), 마니교, 발렌티누스, 켈돈(Cerdon) 및 말시온 같은 모든 이단들을 배격한다.

 

외경(外經)

 

그러나 고대의 학자들이 구약의 어느 책들을 외경이라 부르기도 했다. 다른 이들은 교회문서(Ecclesiastical)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우리는 숨기지 않는다. 고대의 어떤 이들은 교회에서 그것을 읽게 하기는 했으나 신앙확립의 근거가 될 만큼 권위를 지닌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예컨대, 어거스틴의 그의 신국론18, 38장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열왕기 상하에서는 어떤 예언자들의 이름과 책이 인용되고 있으나"라고 하면서 "그러나 그것들이 정경에는 없다."고 덧붙여 말했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러한 책들은 우리의 경건을 위해서 도움이 될 뿐이다."라고 못박았다.

 

2 : 성경의 해석과 교부들, 공의회들 및 전통들에 관하여

 

성경의 참된 해석

 

사도 베드로는 성경을 사사로이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벧후 1:20). 이처럼 우리도 누구나 마음대로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로마 가톨릭의 성경해석을 참되고 순수한 해석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는 성경 전체에서 나온 성경해석이라야 정통적이요, 참되다(기록된 본문의 언어적 본성과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여 해석해야 하고 비슷한 구절들과 단락들, 서로 다른 구절들이나 단락들, 많은 구절들과 단락들 및 보다 더 명백한 구절들과 단락들을 상호 비교하여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신앙과 사랑의 규범에 일치하며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에 크게 공헌하는 성경해석이라야 정통적이며 참되다고 주장한다.

 

교부들의 성경해석

 

우리는 희랍 교부들이나 라틴 교부들의 성경해석들이나 이들의 논쟁이나 논문들이 성경과 일치하는 한 무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이들의 글이 성경과 일치하는 한 무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이들의 글이 성경과 다르거나 정반대되는 것을 가르칠 때 우리는 정중하게 이들에게 이의를 제기한다. 이렇게 한다고 해서 우리가 이들에게 무슨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다. 그도 그럴 것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우리에게 자신들의 글이 얼마나 성경과 일치하며 일치하지 않는가를 증명하기를 명령하며, 일치하는 부분은 받아들이고 일치하지 않는 부분은 받아들이지 말라고 명령한다.

 

공의회(Councils)

 

교회 공의회들이 결정하여 선포한 교령(敎令), 교리들 및 교회법 역시 성경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종교에 관한 논쟁이나 신앙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다만 교부들의 의견이나 공의회의 결정사항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하물며 관습에 의해서나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의 많은 수나 오랫동안 기득권으로 인정된 진리에 의해서도 결코 우리는 종교와 신앙문제를 쉽게 결정해 버릴 수 없다. 판정자는 누구인가? 판정자는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성경에 의하여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이고, 우리가 무엇을 따라야 하고, 무엇을 피해야 하나를 선포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자신이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영적인 사람들의 판단들에 동의한다. 사실 예레미야와 다른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법도에 어긋나는 제사장들의 회집을 맹렬히 정죄하면서 부지런히 우리에게 경고하기를, 조상들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하나님의 법도를 떠나 마음대로 살아가는 저들의 뒤를 따르지 말라고 하였다.

 

인간의 전통

 

마찬가지로 우리는 인간의 전통을 배격한다. 비록 이 전통들이 사도들의 살아 있는 음성에 의하여 교회에게 주어진바 마치 신()적이고 사도적인 것처럼 허울 좋은 제목으로 장식되었고, 사도시대 사람들에 의하여 그 후계자인 감독들에게 전해졌다고 해도 성경에 어긋나는 한 이것들은 결코 사도적 전승이 아니라 인간들의 전통들이다. 왜냐하면 사도들이 교리에 있어서 자기 모순에 빠진 일이 없었던 것처럼 사도시대의 사람들은 사도들과 반대되는 것들을 가르치거나 기록하지 않았다. 사실은 그와 반대로 사도들이 살아 있는 음성으로 전한 것들이 그들의 기록된 문서들과 다르다고 주장하는 것은 악질적이기까지 한 것이다. 바울은 모든 교회에서 동일한 내용을 가르쳤다고 분명하게 주장한(고전 4:17). 또한 그는 "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고후 1:13)라고 하였다. 또한 그의 서신 중 다른 곳에서 바울은 자신과 자신의 제자들, 즉 사도시대의 사람들은 모두 같은 삶을 살았고, 동일한 성령의 역사를 따라 모든 일을 해냈다(고후 2:18)고 증언한다. 이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 역시 일찍이 장로들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는데, 주님께서는 이와 같은 전통들을 전적으로 배격하셨다. , 주님은 저들이 이 전통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법도를 버렸고, 하나님을 헛되어 예배하였다고 말씀하였다(15:1 이하, 7:1 이하).

 

3 : 하나님, 그의 통일성과 삼위일체에 관하여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하나님은 본질이나 본성에 있어서 하나이시며, 스스로 존립하시고, 자족하시며,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고, 육체를 지니지 아니하시며, 공간을 초월하사 광대하시고, 시간을 초월하사 영원하시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의 창조자이시고, 최대의 선()이시며, 살아 계셔서 모든 것을 생동시키시고 보존하시며, 전능하시고 가장 지혜로우시며, 친절하시고 자비하시며, ()로우시고 참되시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고 가르친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시니"(6:4),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20:2-3),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밖에 신이 없느니라……. 나회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45:5, 21),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34:6) 등의 기록된 말씀 까닭에 우리는 다른 신들을 배격한다.

 

하나님은 삼위(三位).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광대불변하시고 하나이시며, 나뉠 수 없는 동일한 하나님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구별되시지만, 이 분의 삼위의 인격은 결코 분리되거나 혼동 될 수 없다는 것을 믿고 가르친다. 성부는 성자를 영원부터 낳으시고, 성자는 형언할 수 없는 출생방법에 의하여 낳으심을 받으셨으며, 성령은 진실로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출하시고, 이 성령 역시 영원부터 계시며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예배를 받으셔야 한다.

 

이렇게 해서 본질이 같으시고 영원성이 같으시며 피차 동등하신 삼 위격(Three Persons: 三位格)이 있는 것이지 세 하나님이 있는 것이 아니다. 위격에 있어서는 구별이 있으며, 순서에 있어서도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먼저 올 수도 있으나 이 삼위는 서로 동등하다. 왜냐하면 이 삼위는 성자와 성령은 신성(神性)을 공유하고 계신다.

 

성경은 삼 위격의 분명한 구별을 계시했다. 예컨대, 천사는 동정녀 마리아에게 다른 말과 더불어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발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1:35)고 말했고,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3:17)라고 하는 그리스도에 관한 소리가 하늘에서 들렸다. 성령은 또한 비둘기의 모양으로도 나타나셨다(1:32). 또한 주님 자신이 사도들에게 세례를 베풀라고 명령하셨을 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28:19) 하도록 명령하셨다. 우리 주님은 복음서의 다른 곳에서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15:26)라고 말씀하셨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는 사도신경을 받아들인다. 그것이 우리에게 참 믿음의 내용을 전해 주기 때문이다.

 

이단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하시고 예배 받으실 만한 삼위일체 하나님을 모독하는 유대인들과 회교도(이슬람교도 혹은 모하메드교도) 등 모든 이단자들을 정죄한다. 성자와 성령은 명목상으로만 하나님이시라든지, 삼위일체 안에는 피조된 그 무엇으로서 다른 위격의 수단에 불과하거나 다른 위격에 종속하는 그 무엇이 있다든가 그 안에 동등치 않은 무엇이 있으며, 대소(大小)가 있거나 육체적인 무엇이나 육체적으로 이해된 그 무엇이 있다던가, 의지에 관하여 피차 상이하다든지, 어느 하나가 동떨어져 나가든지 아니면 피차 혼동된다든지, 즉 마치 성자와 성령은 한 분 성부의 심정의 표출이요, 특성에 불과한 것처럼 생각하는 모든 이단자들을 정죄한다. 군주신론자, 노바티안, 프락세아스, 성부수난주의자들, 양태론자인 사벨리우스, 사모사타의 바울과 아에티우스, 마케도니우스, 신인동형론자들, 아리우스 등이 그렇게 생각했다.

 

4 : 하나님, 그리스도, 그리고 성자들의 우상들과 형상들에 관하여

 

하나님의 형상들

 

하나님은 영()으로서 본질상 가시적(可示的)이 아니요, 광대불변하시기 때문에 예술이나 형상에 의하여 표현될 수 없다.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모든 형상들은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사실을 성경과 더불어 거침없이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방인들의 우상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형상들까지 배격한다.

 

그리스도의 형상들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신 것이 사실이지만 조각가나 화가의 모델이 되시기 위하여 그렇게 인간의 형상을 입으신 것은 아니다. 그는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려 온 것"(5:17)이 아니라고 하셨다. 그런데 율법과 선지자들(4:15, 44:9)은 형상들을 금지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육체적 임재가 교회에게 유익하다는 사실을 부인하시면서 성령을 통하여 영원히 우리에게 가까이 계실 것(16:7)을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그의 육체의 모양들이 경건한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리라고 믿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고후 5:5)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성령에 의하여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다(고전 3:16). 그런즉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고후 6:16)

 

성자들의 형상들

 

하늘에 있는 축복 받은 영들과 성자들은 지상에 사는 동안 자신들에 대해서 예배하거나 어떤 형상을 만들거나 하는 것을 배격했고 정죄 했다. 그런데 이 하늘에 있는 성자들과 천사들,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들의 형상 앞에서 무릎을 끊거나, 모자나 수건을 벗고 경배하는 것을 어찌 기뻐하라.

 

사실 주님은 복음설교(16:15)를 명령하사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관한 것과 이들의 구원에 관한 것을 생각나게 하며 종교를 교육하게 하셨다. 결코 주님께서는 그림을 그리거나 그림들을 수단으로 하여 평신도들을 가르치라고 명령하시지 않으셨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세례와 성만찬이라고 하는 성례전을 제정하셨다. 그는 그 어디에서도 형상들을 만들어 세운 일이 없으시다.

 

평신도의 성경

 

우리가 어느 방향으로 눈을 돌리든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 있고 참된 피조물들을 본다. 이 피조물들을 정당하게만 관찰한다면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모든 형상들이나 허망되고 움직임이 없고 힘이 없고 죽은 그림들보다 이 피조물들이 보는 사람들에게 훨씬 더 생생한 인상을 줄 것이다. 이에 대하여 예언자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115:5)고 하였다.

 

락탄티우스

 

그러므로 우리는 고대 작가인 락탄티우스의 다음과 같은 판단을 인정한다. , "형상이 있는 곳에는 결코 종교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에피화니우스와 제롬

 

에피화니우스 감독이 교회의 문에서 그리스도 혹은 성자 같은 그림이 그려져 있는 베조각을 발견하자 그것을 뜯어냈다. 이것은 성경의 권위에 위배되기 때문에 옳은 행동이었다고 우리는 또한 주장한다. 이때 이래로 그는 참 종교에 어긋나는 그러한 화폭들을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걸지 못하게 하였고, 그리스도의 교회와 믿는 신도들에게 전혀 무가치한 그 문제의 형상들을 치워 버리게 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는 참 종교에 관한 어거스틴의 다음과 같은 의견에 동의한다. , "사람들의 작품에 대한 예배를 우리의 종교로 삼지 말자. 예술작품보다 이것을 만든 예술가 자신들이 더 훌륭하지만, 우리는 예술작품도 예술가도 예배해서는 안 된다"(참된 종교에 관하여55).

 

5 : 유일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숭배와 예배와 기원(invocation)

 

하나님만이 숭배와 예배를 받으셔야 한다.

 

참 하나님만이 숭배를 받고 예배를 받아야 한다고 우리는 가르친다.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4:10)고 하신 주님의 명령대로 우리는 이 예배와 숭상을 그 어느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게도 돌리지 않는다. 진실로 모든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유일의 참 하나님을 떠나 이상한 신들을 숭상하고 예배할 때마다 이들을 엄히 꾸짖으셨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자신이 가르쳐 주신 대로 하나님을 숭배하고 예배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 "신령과 진정으로"(4:23 이하) 해야 하고 미신에 의해서 예배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그의 말씀에 따라 성실하고 진지하게 드리는 예배이다. 어느 때고 그가 우리에게 "누가 너희 손으로부터 이런 것들을 요구했는가?"(1:12, 6:20)라는 말씀이 나오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바울도 말하기를 "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하신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17:25)라고 말한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며, 우리는 이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부를 수 있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

 

우리는 인생의 모든 위기들과 시련을 만날 때에 오직 우리의 유일하신 중보자이시오, 우리를 위해 중보의 기도를 올리시는(intercessor) 예수 그리스도를 명상함으로 하나님을 부르짖는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르 영화롭게 하리로다."(50:14)라고 우리는 분명히 명령받았기 때문이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은혜로운 약속을 받았다. ,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16:23). 그리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11:28). 또한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10:14)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만을 부르짖는데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그렇게 부른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또한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고 사도는 말한다.

 

우리는 성자들(Saints)을 숭배하거나 예배하거나 기도를 위해서 부르짖어서도 안 된다.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하늘에 있는 성자들이나 다른 신들을 숭배하거나 예배하거나 기도를 위해서 부르짖어서도 안 된다. 이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결코 우리의 중보자가 될 수 없고, 우리를 위해서 중보의 기도를 올리는 자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하나님과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42:8)고 하는 이사야의 분명한 말씀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4:12)고 하는 베드로의 말씀이 있으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아들에게만 마땅히 돌려야 할 영예를 다른 것들에게 드리지 않는다.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동의한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로서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는다.

 

성자들에게 돌려야 할 존경

 

동시에 우리는 성자들을 멸시하거나 천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은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지체요, 육체와 이 세상을 영광스럽게 극복한 하나님의 친구들이라고 우리가 인정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이들을 형제로서 사랑하고, 또한 이들을 존경하되 예배하는 것은 결코 아니며, 다만 이들을 존경하고 칭찬할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들을 모방한다. 우리는 이들의 믿음과 덕행을 열렬히 모방하기를 열망하고 영원한 구원을 이들과 나누어 가지며, 하나님의 존전에서 이들과 함께 영원히 거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들과 함께 영원토록 즐거워하기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어거스틴이 그의 저서 참 종교에 관하여(De vera Religione)에서 주장한 다음의 의견을 인정한다. , "우리의 종교가 죽은 자들의 예배(cult)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비록 이들이 거룩한 삶을 영위했다고 해도 이들 자신은 그와 같은 영예를 추구했다고 여겨질 수는 없다.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이들은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하기를 바라며, 이 그리스도의 조명에 의하여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공로에 함께 동참하고 있는 종들이라는 사실을 이들은 기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우리의 모방에 의해서 영예를 받아야 하지 종교적인 방법으로 영예를 받아서는 안 된다."

 

성자의 유해

 

성자들의 유물이 숭배 받고 존경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더더욱 믿지 않는다. 고대의 성도들은 죽은 자들의 영혼이 높이 올라간 후에 이들의 유물을 땅에 정중히 묻어 두는 것으로 이 죽은 자들을 충분히 존경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이 고대의 성도들은 자기들의 조상의 가장 고귀한 유물이란 이들의 덕목, 신학, 그리고 이들의 신앙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이 고대의 신도들은 죽은 자들을 칭찬하면서 이들의 '유물'을 칭찬하고 천거함으로 이들은 이 땅 위에서 사는 날 동안 이 '유물'(덕목, 신학, 신앙)을 모방하려고 애쓴다.

 

하나님 이름으로만의 맹세

 

이 고대의 기독교인들은 성경이 명하는 대로 유일하신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만 맹세했다.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은 금지되었기 때문에(23:13, 10:20) 우리는 성자들을 향하여 맹세해서는 안 된다. 이 맹세는 성경이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모든 일에 있어서 하늘에 있는 성자들에게 너무 과다한 것을 돌리는 교리를 배격한다.

 

6 장 하나님의 섭리에 관하여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통치되고 있다.

 

우리는 하늘과 땅 위에 있는 모든 것과 모든 피조물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이 지혜롭고 영원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보존되고 통치되고 있음을 믿는다. "여호와는 모든 나라 위에 높으시며 그 영광은 하늘 위에 높으시도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자 누구리요? 높은 위에 앉으셨으나천지를 살피시는 이는 누구리요?"(113:4 이하) 또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139:3 이하)라고 다윗이 증거하여 말했기 때문이요, 또한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17:28).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11:36) "고 바울도 증거하여 선포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이 그의 저서 그리도의 투쟁에 관하여(De Agone Christi, 8)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은 진리요, 성경적 근거를 갖는다. "주의 말씀에 의하여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10:29).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함으로 인간이 보기에 전혀 가치 없어 보이는 것일지라도 하나님의 전능에 의해서 통치를 받는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자 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진리이신 그리스도께서 공중의 새도 하나님에 의하여 양육 받으며 들의 백합화도 하나님에 의하여 옷 입혀진다고 말씀하셨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헤아릴 수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6:26 이하)

 

에피큐리안 학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부인하는 에피큐리안 학파 사람들을 정죄하며, 하나님은 하늘의 일에만 바쁘시고 우리와 우리의 일은 전혀 아랑곳 하시지도 않는다고 불경스럽게 주장하는 모든 사람들을 정죄 한다. 궁정 예언자 다윗은 이렇게 정죄 하였다. "여호와여, 악인이 언제까지 개가를 부르리이까?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가 보지 못하며, 야곱의 하나님이 생각지 못하리라 하나이다. 백성 중 우준한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무지한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울꼬,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 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 (94:3, 7-9).

 

무시되어서는 안 될 수단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지는 수단을 불필요한 것으로 생각한 나머지 그것들을 일축해 버려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오히려 이 수단들에게 우리 자신을 적응시켜야 할 것을 가르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사가 하나님의 섭리에 의존함으로 우리의 노력과 정진은 전혀 헛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의 경솔하고 무모한 말을 인정치 않는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섭리의 주관에 맡기고, 우리는 그 무엇에 대하여도 근심과 걱정을 할 필요가 없으며, 그 무슨 행동도 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저들의 주장은 경솔하고 무모하다고 말한다. 비록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23:11)고 말씀하셨고, "너희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머리터럭 하나라도 잃을 자가 없느니라."(27:22, 34)고 덧붙여 약속하신 하나님의 섭리 하에 바울은 백부장과 선원들에게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27:31)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것의 목적을 설정하신 하나님께서는 시작을 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목적에 이르는 수단들을 정하셨기 때문이다. 이교도들은 모든 일이 맹목적인 행운과 불확실한 우연에 의하여 일어난다고 본다. 그러나 성 야고보는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여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고 말하기를 원치 아니하고, 엇붙여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4:13,15)고 말하였다. 어거스틴은 그래서 "허망된 사람에게는 본성상 우연히 일어나는 것 같은 모든 일이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일어난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만 일어나기 때문이다."(시편강해 148)고 말하였다. 사울이 그의 아버지의 나귀를 찾다가 예기치 않게 예언자 사무엘을 만난 것은 단순히 우연한 일인 것처럼 보이나, 주님께서는 이 예언자에게 미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 "내일 이맘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보내리라"(삼상 9:16).

 

7장 만물의 창조, 즉 천사와 마귀와 사람의 창조에 관하여

 

하나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이 선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영원하신 말씀에 의하여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또한 하나님과 말씀과 더불어 영원하신 성령에 의하여 그 모든 피조물을 보존하신다. 다윗은 이 사실을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기운으로 이루었도다"(33:6)라는 말로 증거 하였다. 성경에 의한, 즉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다 선하며, 사람들의 유익과 이용을 위해서 지음 받았다. 이제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한 시작에서 나왔다고 주장한다.

 

마니교 사람들과 말시온주의자들

 

우리는 마니교 사람들과 말시온주의자들을 정죄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두 실체와 두 본성이 있다고 하는 불경스러운 상상을 가지고 하나는 선하고 다른 하나는 악하다고 보며, 두 시작과 두 신이 서로 대결하고 있다고 하는 상상을 가지고 하나는 선하고 다른 하나는 악하다고 하기 때문이다.

 

천사와 마귀에 대하여

 

피조물들 가운데 천사와 사람이 가장 탁월하다. 성경은 천사에 관하여 "바람으로 자기 사자를 삼으시며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104:4)라고 했으며,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1:14)라고 했다. 마귀에 관하여 주 예수님 자신이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 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8:44)과 말씀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가르친다. , 어떤 천사는 끝까지 순종함으로 하나님과 인간을 섬기는 신실한 종의 임무를 위임받으나, 다른 천사들은 자신들의 자유의지의 남용으로 타락하여 멸망에 떨어져 모든 선하고 신실한 사람들의 원수가 되고 말았다.

 

인간에 관하여

 

사람에 관하여 성경은 태초에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에 따라 선하게 창조되었고, 하나님이 그를 낙원 안에 두셨고, 만물을 이 사람에게 복종시켰다(2)고 말한다. 이 내용은 다윗이 시편 8에서 훌륭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과 같다.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에게 아내를 주어서 그를 축복하셨다. 우리 역시 인간의 한 인격 안에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실체가 있음을 주장한다. , 하나는 불멸의 영으로서 육신으로부터 분리될 경우 자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며, 다른 하나는 죽어야 할 육체로서 최후심판 때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할 것이니 살아 있는 때이든 죽어서든 간에 전인(全人)이 영원히 보존되는 것이다.

 

이단들

 

우리는 영혼의 불멸성을 비웃거나 교묘한 이론에 의하여 이것을 의심하는 사람들과 육체가 죽은 후 영혼은 잠을 자고 있다든지 영혼은 하나님의 한 부분이라고 말하는 모든 사람들을 정죄한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아무리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라도 그것이 창조와 천사와 마귀와 사람에 관하여 그리스도의 사도적 교회의 성경이 우리에게 전해 준 진리와 어긋나는 것이라면 그러한 모든 의견을 정죄 한다.

 

8. 인간의 타락과 죄와 죄의 원인에 관하여

 

인간의 타락

 

태초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 음받은 인간은 의롭고, 참으로 거룩하고, 선하고 정직했다. 그러나 인간이 뱀의 유혹과 본인의 잘못으로 선과 의를 버렸을 때 그는 죄와 죽음과 온갖 참화에 종노릇하게 되었다. 따라서 아담의 모든 후손도 아담처럼 죄와 죽음과 온갖 참화에 종노릇하게 되었다.

 

 

죄란 인간의 내적인 부패이다. 이것은 우리 인류의 처음 부모에게서 기원하여 우리 안에 확산되어 있는 것으로, 우리는 이 내적인 부패로 말미암아 사악한 욕망에 빠져 있고 선을 싫어하고 모든 악의 성향을 갖는다. 우리는 온갖 사악과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경멸과 증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 어떤 선행도 할 수 없으며, 선에 대하여 스스로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가 나이를 먹어 감에 따라 마치 못된 나무가 썩은 열매를 맺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법도에 어긋나는 우리 자신의 악한 언행심사에 의하여 썩은 열매를 맺을 뿐이다(12:33). 이런 까닭에 우리는 마땅히 우리 자신의 과오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며 하나님의 의로운 형벌을 받는다. 그 결과 구원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으셨다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에 의하여 버림을 받았을 것이다.

 

죽음

 

죽음이란 우리 모두가 죄 때문에 한 번은 당하고야 말 육체의 죽음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죄와 부패로 말미암는 영원한 형벌이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했기 때문이다. ,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2:1-5),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5:12).

 

원죄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인간 안에는 원죄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자범죄(실제죄)

 

우리는 원죄로부터 나오는 모든 다른 죄들도 참으로 죄임을 인정한다. 이 죄들이 어떤 이름에 의하여 일컬어진다 해도, 가령 죽을 죄이든, 용서받을 수 있는 가벼운 죄이든, 용서받을 길 없는 성령 거역죄이든 간에(3:29, 요일5:16) 이 모든 죄들은 죄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부패와 불신앙이라고 하는 동일한 원천에서 이 죄들이 나왔으나 이 죄들은 모두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분명히 더 심각한 죄들과 덜 심각한 죄들이 있다.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소돔이 복음을 거역한 도시보다 더 견디기 쉬웠다고 하는 사실이다.(10:14, 11:20)

 

이단들

 

우리는 위의 사실과 어긋나게 가르치는 모든 사람들을 정죄한다. 특히, 펠라기우스와 모든 펠라기우스주의자들 및 스토아학파 사람들과 더불어 모든 죄를 동일시하는 요비니우스주의자들(Yovinians)을 우리는 정죄한다. 이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는 성경에서 모든 근거를 찾으며 성경에 입각하여 그의 견해를 변호하는 어거스틴의 견해에 동의한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레니우스의 논적이었던 플로리누스(Florinus)와 불라스투스(Blastus)를 정죄하며, 하나님이 죄의 원인이라고 가르치는 모든 사람들을 정죄한다.

 

하나님은 죄의 저작자가 아니다. 하나님은 어느 정도까지 인간을 강퍅하게 하신다고 우리는 말해야 하나?

 

성경은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하며"(5:4)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또한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 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8:44)라고도 말씀하셨다. 그 뿐만 아니라 이미 우리 속에 죄성과 부패가 충분히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더 큰 사악함과 완고함을 다시 넣으실 필요가 없으시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강팍케 하고, 눈멀게 하고, 버림받은 마음 그대로 내버려 두신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심판자와 복수자로서 그것을 의로운 심판에 의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끝으로 성경에서 종종 하나님께서 악한 일을 행하신다고 말해지거나 그렇게 보일 때가 있는데, 그것은 인간이 악을 행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의 의로운 심판에 따라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시든가 그렇게 하는 것을 막지 아니하신다는 말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원하실 경우, 그것을 막으실 수도 있으며, 요셉의 형제들의 죄의 경우에서처럼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악을 선으로 바꾸어 놓으시기도 하시고, 죄가 적정선 이상으로 폭발하거나 광분할 것을 우려하여 죄를 제거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죄를 허용도 하시고 미리 방지도 하시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그의 저서 [입문서:Enchiridion]에서 "하나님의 뜻에 반대하여 일어나는 모든 일도 놀랍고도 형언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일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는 일은 일어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마지못해서 허락하시는 것이 아니라 쾌히 허락하신다.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악이 저질러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다. 필경 하나님은 전능하신 까닭에 악으로부터 선을 만드실 수 있기에 악을 허용하시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한다

 

이상한 질문들

 

하나님께서 아담이 타락하기를 원하셨는지, 아담이 타락하도록 자극하셨는지, 왜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타락을 미리 막지 않으셨는지 등의 질문들은 호기심에서 나온 질문들이다. 그 이유는 이단과 심술궂은 사람들이 이 질문들의 해답을 말씀 밖에서 구하기 때문이다. 하기야 이와 같은 호기심은 주님께서 금단의 열매를 먹지 말도록 금하시고 이것을 범한 사람을 형벌하셨다는 사실에서 온 것이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일단 일어난 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뜻과 능력의 관점에서는 악한 것이 아닌데, 오직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사단과 우리의 뜻의 관점에서 악한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9. 자유의지와 인간의 능력

 

이 문제는 교회역사를 통하여 많은 논란을 야기시켜 왔는데,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의 상태를 삼중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타락 전의 인간

 

인간에게는 탁락 전의 상태가 있었다. 이 상태에서 인간은 옳고 자유하였다. 그래서 그는 계속 선에 머물러 있을 수도 있었고 악으로 기울어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인간은 악을 선택하여 악으로 넘어갔으며, 이미 지적한 대로 그 사람 자신뿐만 아니라 전 인류가 죄와 죽음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타락 이후의 인간

 

그래서 우리는 타락 후의 인간의 모습에 대하여 생각해야 한다. 인간은 타락으로 이성과 의지를 결코 상실하지 않았다. 인간은 결코 목석이 아니다. 그러나 인간은 너무나도 크게 변했고 약화되어서 타락 이전에 할 수 있었던 것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성은 어두워졌고, 의지는 노예의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이성과 의지는 죄를 섬기되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한다. 분명히 죄를 짓는 것은 의지이다. 이것은 의지 아닌 그 무엇도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악을 행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악이나 죄에 관하여 하나님이나 마귀에 의하여 강요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악을 행하고 범죄한다. 이 점에서 인간은 전적인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서 인간의 악질적인 범행과 계획을 좌절시키시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악행에로의 자유의지를 인간에게서 박탈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자유의지에 의하여 계획한 것을 미리 막아 버리시는 것이다. 예컨대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을 없애버리려고 결심하였으나 그것을 실천할 수 없었다. 하나님의 선한 계획이 따로 있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인간은 선() 자체를 할 수 없다.

 

인간의 이성은 구원과 하나님의 요구에 관하여 스스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다. 복음서들과 사도들의 글들은 누구든지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중생해야 할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타락 이후의 인간은 자신의 구원에 아무것도 공헌할 수 없다. 바울은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2:14)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다른 곳에서 우리 스스로가 어떤 선한 것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고후3:5).

 

이제 지성(知性)이 의지(意志)의 인도자인데, 이 인도자가 장님일 때 의지가 얼마나 걸어갈 것인가가 분명하게 된다. 그러므로 아직 중생하지 않은 사람은 선을 의지(意志)할 수도 없고 선을 실천해 낼 힘은 더더욱 없다. 주님은 복음서에서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8:34)고 말씀하셨고, 사도 바울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8:7)고 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일들에 관하여는 타락한 인간이라도 이성의 능력을 결핍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학문들에 대한 이해력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비에 의하여 사람 안에 비록 타락 전에 있던 것과는 다르나 지성의 힘이 남아 있도록 허락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타고난 자연적 재능을 배양하라고 명령하실 뿐만 아니라 선물과 성공을 첨가해 주신다. 하나님의 축복이 없이는 모든 학문의 발전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어떤 경우에도 성경은 모든 학문의 기원과 발전이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고 가르치며, 심지어 이교도들까지도 학문의 기원을 이 학문을 창조한 신들에게서 찾는다.

 

중생한 사람의 능력은 어떠한 것이며, 중생한 사람의 의지는 어떤 모양으로 자유로운가?

 

끝으로 우리는 중생한 사람들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어느 정도로 가지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중생에 있어서 이성은 성령에 의하여 조명 받아 하나님의 신비들과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다. 이 중생에 있어서 또한 의지 자체가 성령에 의하여 변화받 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선을 의지하며 선을 실천하기까지 할 수 있는 능력으로 무장되기도 한다.1)

 

만약 우리가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기독교적 자유를 부인하게 되며 율법의 멍에를 다시 불러들이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리라"2)

 

고 말씀하셨고, 주님은 복음서에서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8:36)라고 말씀하셨다.

 

바울 역시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1:29)고 편지하였다. 또한 여기에서 바울은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1:6)고 하였고, 나아가서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2:13)라고 말했다.

 

중생한 사람들은 수동적으로 뿐만 아니라 능동적으로 일한다.

 

이 주제에 관하여 우리는 두 가지를 유의해야 한다. 첫째로 중생한 사람들은 선을 택하고, 선을 행할 때에 수동적으로만 아니라 능동적으로 그렇게 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스스로 행할 수 있기 위하여 하나님에 의하여 움직여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돕는 분이시다"라고 하는 말을 어거스틴은 옳게 인용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스스로 무엇을 하지 않는다면 도움을 받을 수 없다. 마니교 사람들은 인간으로부터 모든 능동성을 빼앗아 버림으로 인간을 돌이나 한 조각의 나무로 만들었다.

 

중생한 사람의 자유의지는 약하다

 

둘째로 중생한 사람 안에는 약한 성향이 아직 남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안에 죄가 도사리고 있으며 중생한 자의 육()이 죽을 때까지 영과 싸우기 때문에 이 중생한 우리는 매사를 원하고 계획한 대로 쉽게 실천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로마서 7장과 갈라디아서 5장에서 확증하였다. 따라서 우리의 자유의지는 옛 아담의 잔재와 우리의 생명이 끝날 때까지 우리 안에 머물러 있을 우리의 내적 부패 때문에 늘 약하다. 그런데 육체의 힘과 옛 사람의 잔재가 성령의 역사를 소멸할 만큼 효과적이 아니기 때문에 신자들은 자유하다고 말해질 수 있으나 항상 자신의 연약성을 인정하면서 자유의지를 자랑해서는 안 될 것이다.

 

믿는 사람들은 어거스틴이 사도의 말을 빌려 여러 번 타일러 준 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고전4:7)라는 말이다. 여기에 첨가하여 그는 우리가 계획한 것이 즉시 실현되는 것은 아니라 하였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장중에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바울은 그의 여행이 소득이 있는 것이 되게 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하였다.3)

 

이것은 또한 자유의지가 약해서 그랬던 것이기도 하였다.

 

이 세상의 일들에 있어서는 자유가 있다.

 

이 세상의 일들에 있어서는 중생한 사람들이나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이 모두 자유의지를 향유하고 있다. 이 사실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인간은 무엇을 원하기도 하고 원치 않기도 하는 본성을 갖고 있다. 다른 생물들도 이와 비슷한 본성을 지녔는데, 인간은 단연 이들보다 우월하다. 예컨대 인간은 말을 할 수도 있고 침묵을 지킬 수도 있으며, 집으로부터 나갈 수도 있고 집에 머물러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하나님의 힘이 관여한다. 예컨대 발람이 자기는 더 가기를 원했으나 하나님의 간섭으로 갈 수 없었고, 스가랴가 성전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원했으나 하나님의 간섭으로 말할 수 없었다.4)

 

이단들

 

이 문제에 관련하여 우리는 마니교 사람들을 정죄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악의 기원이 창조된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사실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악한 인간이 하나님이 명하신 선을 행할 만한 충분한 자유의지력을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을 정죄한다. 성경은 이 두 가지 입장을 모두 거부한다. 성경은 전자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곧게 창조하셨다"5)

 

고 말하고 후자에게는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8:36) 고 한다.

 

10. 하나님의 예정과 믿는 성도들의 선택에 관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은혜로 선택하셨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그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그리고 순수한 은혜로 또한 사람의 그 무엇을 조건으로 삼지 아니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기로 의지하셔서 성도들을 예정 혹은 선택하셨다. 사도 바울은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1:4) 라고 하였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1:9) 고 하였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되었거나 선택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것은 우리의 공로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 때문에 택하시는 것이지 우리의 공로 때문에 택하시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하신 목적은 이제 신앙으로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는 사람들이 택함을 받은 사람인 것을 확증하기 위해서이다. 사도 바울이 "(고후13: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 말했기 때문에 그리스도 밖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버림받은 자들이다.

 

우리는 확실한 목적을 위하여 선택받았다.

 

결국 믿는 성도들은 확실한 목적을 위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았다. 사도 바울은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1:4-6)고 하였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좋은 소망을 품어야 한다.

 

하나님은 누가 자기의 자녀인지, 그리고 성경은 여기저기에서 소수의 선택자를 언급하고 있으나 우리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것을 소망해야 하고, 어떤 사람의 버림받은 자라고 성급하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바울은 빌립고 사람들에게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1:3-6)고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선택되었나에 대하여

 

주님께서 구원받아야 할 사람은 소수에 지나지 않느냐라는 질문을 받으셨을 때 그는 얼마나 적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아야 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멸망을 받아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말씀하시지 않고, 모든 사람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13:24)고 권고하셨다. 여기에서 주님은 너희가 이 일에 관하여 호기심을 가지고 꼬치꼬치 캐물을 것이 아니라, 곧은 길을 택하여 하늘에 들어가기 위하여 노력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 일에 있어서 정죄받아 마땅한 일

 

그러므로 우리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택함을 받았고, 나는 이 소수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나는 생을 마음대로 즐기겠다"라고 불경건하게 말하는 이들의 말을 인정하지 않으며, 또다른 이들이 다음과 같이 말할 때에도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 "만약 내가 하나님에 의하여 예정되었고 선택되었다면 나를 구원에서 떠나게 할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구원은 예정과 선택에 의하여 확보되었으니 나는 아무 짓이나 해도 좋다. 다른 한편 만약 내가 버림받은 자의 수에 포함된다면 하나님의 불변하는 작정 때문에 나의 신앙이나 회개는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말은 이런 종류의 사람들의 주장과 배치된다. , "(딤후2:24-26)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

 

구원의 선택으로 말미암는다고 해서 훈계나 권고가 불필요하고 헛된 것은 아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자유로운 선택과 예정, 그리고 건전한 훈계들과 교리들은 모두 설교되어야 한다고 보았다(견인의 선물에 관하여/14장 이하)

 

우리는 택함을 받은 사람들인가에 대하여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선택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에 대하여 묻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하나님이 이들에 관하여 영원 전부터 작정하신 바가 무엇일까? 사실은 복음 설교가 이해되고 수용되어 신앙되고,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이 틀림없이 믿어질 경우, 우리는 택함을 받은 것이 확실하다. 방금 디모데후서 1:9-106)

 

있는 사도 바울의 글에서 보여 준바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이 예정의 영원하신 목적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다. 이런 까닭에 무엇보다도 우리가 가르쳐야 하고 생각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우리를 향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이다.

 

우리는 주님 자신이 복음서에서 매일 우리에게 무엇을 설교하고 계신가를 알아야 한다. 주님께서는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8:14)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고 설교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안경이 되게 하자. 우리는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예정을 명상하자. 만약에 우리들이 그리스도와 사귐을 가지며 참 신앙 안에서 그분이 나의 것이요, 내가 그분의 것이 된다면 이는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분명하고도 확실한 증거이다.

 

예정에 관련된 시험(훈련)

 

예정에 관련된 시험보다 더 위험한 것은 없다. 우리는 이 시험에서 하나님의 약속들이 모든 신자에게 적용된다고 하는 사실에 직면한다. 왜냐하면 "(11: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주께서 말씀하셨고,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6:9)라고 하나님의 전교회와 더불어 기도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두 가지인바 하나는 우리가 세례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았기 때문이요,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서 영생에 이르기 위하여 그의 살과 피로 빈번히 양육 받기 때문이다. 이것에 의하여 강건케 된 우리는 바울의 명령대로 두려움과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힘쓰도록 명령을 받았다.